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4. 지렁이)

이효범 2019. 9. 9. 21:42

o 지렁이

 

또박, 이효범

 

하느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지렁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물고기를 잡는 미끼가 되기 위해

지렁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용도 아니고

뱀도 아니며

더더욱 고구마도 아닌

, 놀라워라 지구의 선한 청소부.

 

몸은 새의 먹이가 되고

똥은 채소의 퇴비가 되어도

억울하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태풍이 지나간 후

젊잖게 기어가는 지렁이를 보아라.

 

땅과 하나가 되어

기어코 죽은 땅을 살려내는 붉은 성자.

 

지렁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후기:

태풍 링링이 지나갔습니다. 방송에서는 연일 태풍을 대비하여 가능한 한 집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지난 주말 고등학교 동문들과 대천해수욕장에 있는 공주대수련원에서 일박하면서 테니스하려는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수련원이 태풍을 대비하여 휴관한다고 환불통지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집안에만 있으니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이 답답하였습니다. 잘 안 보던 텔레비전을 연일 틀어놓고, 신문을 보고 또 보며 구석구석에 있는 인사란까지 샅샅이 흩었습니다. 자연은 태풍으로 난리인데, 사회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문제로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찬반으로 갈라져 나라가 두 동강난 것처럼 온통 뉴스는 조국으로 뒤덮었습니다. 여기에 빠져 나는 잠도 안자면서 마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한밤까지 SNS에 떠있는 조국 관련 정보에 심취하였습니다. 세상에, 인생에 이렇게 열심히 한 주제를 써치한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상했던지 사랑스런 아내가 끼어들었습니다. “왜 비싸게 산 연구실은 안 가고 집안에서 이렇게 씩씩거려요?” “나라가 걱정이 들어서 그래.” 난 귀찮다는 듯 무뚝뚝하게 댓구하였습니다. “그런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날씨가 후덕지근한데 당신이 그렇게 원했던 강변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서 저녁이나 먹어요.” 그래 맞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산전수전 겪은 이 늙은 나이에 내가 무슨 애국투사인냥 건강까지 해쳐가며 이렇게 흥분하고 있지. 대학교 일학년 때 유신헌법에 빈대한다고 서강대학 학생회관에서 단식 농성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한밤에 외국인 총장님이 들어오셔서 걱정 어린 눈으로 학생들 안전을 위해 귀가를 종용하셨습니다. 단식 이틀이 되니 두 패로 갈라졌습니다. 한밤에 그래도 무엇인가를 먹으면서 단식을 이어가자는 현실파와 굶어죽더라도 명분을 고수하자는 순수파. 나는 후자를 택했지만 배고픔이 의지를 압도했습니다. 결국 소수가 남은 우리는 울면서 애국가를 부르면서 단식을 끝냈습니다. 그때는 세상에 관한 지식은 부족했지만 순수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경험은 풍부하고 세상을 보는 눈은 깊어졌는지 모르지만 실천력이 사라졌습니다.

강변에 나와 보니 바람이 세찹니다. 풀들이 파도치는 것 같습니다. 나무는 꺾일 듯 휘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많은 잎들이 벌써 떨어져 바람에 휘날립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밑에서 모든 생명들은 바짝 엎드려 긴장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런 거친 모습도 자연의 한 현상이고, 우리 생명체는 토인비의 표현을 빌리면 자연의 이런 끝없는 도전에 응전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만이 그런 도전에 성공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방할 때 문명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문제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인생은 평생 문제를 푸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토인비는 도전은 파도처럼 계속 덮쳐오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노를 놓고 쉬고 있다거나, 성공에 취해 자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은 앞의 도전과는 전혀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자만에 빠져 앞의 성공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패망의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자연의 상황이나 우리 사회의 인간의 일이 모두 긴장해야 할 위기임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하염없이 강둑을 걷다가 카톡방에서 친구가 보내준 조크를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세상에는 귀중한 금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황금’, ‘소금’, ‘지금이 그것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카톡방 조크에는 이 말에 아내는 “‘현금’, ‘지금’, ‘입금’”이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있으니 아내한테서 쪼르르 문자가 왔습니다. “꼬리곰탕을 끓여 놓았으니 빨리 오세요.”

나는 적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호시탐탐 퇴직금을 노리는 아내가 정말로 관심을 갖는 것은 남편의 현금이 아니고 남편의 건강이었나. 나는 모른 척 하고 내일 아내의 통장에 다소 얼마라도 입금시켜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