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3 (로스 아르코스)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3(로스 아르코스)
구녕 이효범
아침 7시에 식당에 내려가니 먼저 와 식사를 하던 우리나라 노처녀가 반갑게 손짓을 한다. 쾌활한 모습이다. 혼자라도 이렇게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행복해한다. 그리고 여기 여주인이 다음 숙소를 예약하여 오늘은 근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여, 식사 후 나도 부탁했다. 여주인은 열심히 찾더니 난감해한다.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모든 숙소가 완전히 차서 예약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미안해한다.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으니, 누군가가 재워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밖에 나가니 코끝이 찡하고, 찬 기운이 이마를 때린다. 하늘에 구름이 짙었지만 명징한 날씨이다. 먼지 하나 없다. 이런 아침에는 한 소식이 들리던가, 여기는 서양이니 데카르트처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 즉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과 같은 명제가 떠올라야 하는데, 지난 50년 동안 무의식에 숨어 있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추억이 먼저 찾아온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인데, 식구도 보는 여기서 밝혀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폐결핵이 걸려 1년간 휴학했다. 집에 내려와 있던 나는 무료하기도 하고 외로워서 대전 근교를 정신 없이 걸어 다녔다. 지금은 대청댐으로 수몰되어 있지만, 내탑에서 신탄진까지 강가를 여러 번 혼자 걷기도 했다. 어느 날 모임 후배가 자기 친구를 소개했다. 선배가 늘 찾던, 지적이면서 야생마를 닮은 여자라 잘 맞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녀는 서울 명문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 문제로 휴학하고 집에 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취미도 같고 할 말도 많아 금방 친해졌다. 하루 종일 바람을 맞으며 들판을 쏘다니다가, 노을이 진 후, 그때 대학생들이 자주 갔던 대전역 앞 음악다방에 들러 클래식을 들으면, 마치 세상을 다 가진냥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다. 한겨울 따뜻하게 보내고 나는 몸이 치료되어 복학하고, 그녀도 정신이 안정되어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야생에서나 어울리는 짝이었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가난한 나는 그녀에게 어울릴 수 없었다. 손까지는 잡았지만, 키스 한 번 나누지 못하고, 아주 오래전 잊은 사람인데, 왜 이런 낯선 이국에서 갑자기 떠오르는지, 나노 알 수 없었다.
숙소를 떠나 한 30분 걷는데 어디선가 와인 냄새가 났다. 인가도 없고 포도나무 하나 없는 곳에서 와인 냄새라니? 내 코가 잘못되었나? 그러나 한 4km 정도 가니까, 강을 끼고 큰 와인공장이 가동 중이었다. 거기에서 바람을 타고 이 먼 데까지 향기가 퍼진 것이다. 그 협곡을 계속 따라가니 유명한 에스테야 마을이 나온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에스테야와 관련해서는 약간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다. 1270년 무렵, 파트라스라는 그리스 도시의 주교는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파트라스에서 순교한 사도 성 안드레의 어깨뼈를 가지고 갔다. 주교는 가장 가난한 순례자처럼 여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중드는 사람도 없이, 혼자 걸어서 에스테야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돈 없는 다른 가난한 순례자들처럼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귀중한 성물은 특수하게 제작된 상자 안에 넣어, 가슴에 묶어, 옷 속에 숨겨 놓았다. 사람들은 산 페드로 성당의 수도원에 그를 묻었다. 그날 밤, 성당지기가 새로 묻은 무덤 위로, 신비한 빛이 떠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덤을 파보니 성 안드레의 성물과 구리에 법랑을 입힌 지팡이의 윗부분(프랑스 리모주산 도자기), 성찬식 때 포도주를 담는 그릇인 주수병 2개, 비단 장갑들이 들어있었다. 나중에 안드레는 에스테야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런 역사가 있어서 그런데 에스테야는 유서 깊은 큰 성당이 많았다.
에스테야를 감동적으로 지나니 이라체 와인 샘이 나왔다. 이 샘은 사실 보데가스 이라체라고 하는 포도주 회사가 창고에 인위적으로 만든 샘이다. 창고 벽에는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포도주가 나온다. 나는 손으로 물만 떠서 마셨다. 어떤 아주머니가 빈 물병에 포도주를 조금 담는다. 내가 가득 담으라고 권했더니, 그럴 수도 없다고 사양한다. 포도주 회사 길 건너는 큰 수도원이 있다. 지금은 비어있는 것 같았다. 왜 수도원 근처에 이런 와인 생산지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 후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고서는, 인가 하나 없는 끝없는 구릉의 신작로가 이어졌다. 한 삼십리 되는 것 같다. 이 길을 나는 박목월의 나그네처럼 온 것도 아니고, 한하운의 전라도 길처럼 온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 삼십리 떨어진 광천장에 간 적이 있다. 파장이 되고, 노을이 지는 저녁에, 아버지는 막걸리 몇 잔 거치시고 앞에 가시고, 나는 십리 간다는 막대사탕 하나 물었으나, 이미 녹았는데도 집은 안 나타나고, 울면서 울면서 갔던 기억으로 왔다. 아버지는 이제 안 계시고 그때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나이의 한 늙은이가 속으로 울면서 왔다. 산천은 달랐으나 신작로는 어렸을 때 보았던 그대로였다. 그렇게 오후 4시경에 마침내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중간에 음식 파는 트럭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내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순례자로 이 마을에 온 것은 나일 것이다. 모든 숙소는 이미 만원이고, 마지막 숙소에 지쳐서 가니, 한 늙은 할머니가 나를 한참이나 뚫어본다. 그리고 마지막 한자리 남았다고 한다. (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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