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2 (비야투에르타)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2 (비아투에르타)
구녕 이효범
오바노스에서 8시에 길을 나섰다. 부슬비가 내린다. 어제는 참으로 춥게 잤다. 오바노스 다음에 더 큰 마을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혹시 빈 호스텔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발바닥이 걱정되어 여기서 멈추었다. 그런데 호스텔은 중세의 성처럼 묵중하게 돌로 지어졌는데 난방 시설이 없다. 오싹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나오니 식당이 없고 바만 하나 불이 켜져 있다. 들어가니 이곳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다가 일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식사를 할 수 없어, 마트에 들려 물 한 병, 사과 하나, 오렌지 2개, 긴 막대기 같은 빵, 그리고 주인이 추천한 돼지고기 절편을 사 가지고 왔다. 뜨거운 물은 나오지만 샤워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비치된 여러 담요를 덮어쓰고, 걸을 때 입고 온 옷 그대로 쓸어져 잤다.
어제의 일진은 지나갔고 오늘의 일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푸엔테 라 레이나에 가는 길은 조용했다. 어제 아내는 싸게 샀다고 자랑하는 비행기표를 결국 사진 찍어 보냈다. 통고였다. 나는 5월 16일까지 파리로 돌아가 사랑스런 아내를 맞이해야 한다. 그때까지 이 먼 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내도 70이 넘은 할머니이다. 더 몸이 약화되기 전에, 꿈에 그리던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말리겠는가? 이제 우리 나이는 아침에 눈 떴다고 아내한테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냥 마나님께 절대복종하는 길이 현명하다. 길가에 보라색으로 핀 엉겅퀴도 그러라고 말하고, 빨간 꽃양귀비도 그것이 좋겠다고 동의한다.
푸엔타 라 레이나는 이 지방에서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묵은 곳은 면사무소가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군청 소재지 정도라고나 할까. 입구에 들어서니 호텔이 여럿 보이고, 물컹 상업 냄새가 났다. 여기서 잠을 잤으면 편했을 텐데 안타깝다. 팜플로나에 오기 전에는 너무 지나쳐서 고생했고, 여기서는 모자라서 추위에 떨었다. 중용을 찾는 일이 이리 어려운가? 눈에 보이는 세상도 그러한데 또한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살을 섞는 부부관계도 그럴 것이다. 시내로 들어가 도장을 받으려고 어느 성당에 들어가니, 최근 조각된 젊은 예수님이 막 걸어오시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 안쪽 어두운 구석에서는 한국의 젊은 여성이 자기보다 큰 배낭을 옆에 놓고 깊은 묵상에 잠겨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양 볼에 햇살을 막는 패치를 붙인 채 젊은 여성이 경쾌하게 걷어간다. 우리나라 여성들이여, 모두 만세다. 조금 앞에는 스페인 여성 4명이 수다스럽게 떠들며 걸어간다. 그들은 달걀을 세워놓은 듯한 작고 귀여운 얼굴에, 큰 바위를 단 엉덩이로, 뒤에서 보기가 재미있다.
도시를 빠져나가 한 30분 걸으니 제법 높은 고개가 나온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한 나는 고개 입구부터 기가 질려 잠시 쉬고 있으려니, 옆에 나이 든 할머니와 젊고 뚱뚱한 미국 여성이 물을 마시기 위해 머문다. 나는 보기가 좋다면서 모녀냐고 물었다. 엄마의 언니라고 답한다. 내가 영어로 벅벅대니 그녀는 ‘니스(niece)’라고 알려준다. 이래 봐도 나도 명문 중학교를 나왔는데, 그런 쉬운 단어도 모르다니, 총기가 사라진 것 같다. 이제 늙으니, 총기는 완전히 사라지는가? 총기를 총기 있게 하는 어떤 놈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그놈은 어떤 놈일까? 생각에 몰두하여 언덕에 오르니, 쉬고 있던 두 사람이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젊은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과장하지 않고, ‘강하다(strong)’고 총기 있게 말해주었다.
점심이 지난 시간에 로르카를 지나갔다. 포도나무들이 눈에 띈다. 이 지역은 스페인 북부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이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프랑스 보르도를 경험한 내게는 촌스럽게 보였다. 순례길은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한다. 왜 이들은 마을을 높은 곳에 세워 순례자들을 어렵게 하는가. 아마 전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들의 침입을 막는 데는 고지가 제일 안전했으리. 멀지 않아 신비한 이야기 있는 에스테야지만 발바닥의 감촉이 이상하다. 가다가 중지할망정 무리할 이유는 없다. 예쁜 알베르게가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갔더니, 한국인들이 몇 명 이미 선점하고 있다. 여주인이 친절하다. (2024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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