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여행기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3(보르도1)

이효범 2024. 4. 16. 12:39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3 (보르도1)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3 (보르도1)

 

구녕 이효범

 

아침 8에 몽파르나스역에 오니 그 넓은 홀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음식점도 많은데 아직 프랑스 식당에 들어가는 것은 겁이 난다. 다행히 한쪽에 맥도날드가 있다. 반갑게 들어가서, 제일 만만한 햄버거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6.70유로다. 괜찮다 싶었는데 웬걸, 햄버거가 어찌나 얇은지 한입에 톡 털어 넣을 정도였다. 두 테이블 건너 창가에 중년의 아주머니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음식을 먹고 있다. 그 창문 너머에는 마로니에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 조금 있으려니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려고, 짐을 봐 달라고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인다. 아마 5분쯤 걸린다는 표시이리라. 아니 프랑스 아줌마가 이국인인 나를 보고 짐을 봐달라고 부탁을 한다? 내 얼굴이 그렇게 믿음이 갔나! 나이든 사람의 얼굴과 몸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그러면 나는 속죄하기 위해 굳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갑자기 불법을 구하려고 당나라에 가다가 得道를 하고 돌아선 원효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원효를 흉내낼 수는 없다.

 

파리에서 보르도까지는 TGV2시간이 걸린다. 기차가 역을 떠나니 기찻길을 따라 설치한 벽이 재미있다. 시멘트벽인데 마치 나무판자로 만든 것 같고, 벽이 파도치듯 높이가 다르고 경사면이 다르다. 인공적인 벽이지만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다. 저런 정신이 프랑스의 자유스런 문화와 명품들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10분쯤 지나니 지평선이 보이는 대평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온통 노란 유채꽃 바다이다. 예전에 중국 지린성에서 하얼빈까지 만주 대 벌판을 기차로 달린 적이 있는데, 풍경은 물론 여기가 화려하지만 규모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프랑스는 큰 나라다. 이런 면에서 보면 프랑스는 대표적인 농업국가이다.

 

나는 보르도에서 1박을 할까 2박을 할까 결정을 짓지 못했다. 내면에서 두 마음이 계속 싸움을 했다. 한 마음은 말한다. 순례를 시작하는 프랑스 마을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e- de- Port)로 가는 길목에 있어, 잠시 들르기는 해도, 그래도 너는 순례길을 떠난 것이다. 사실 1박을 해서도 용서받기 어려운데, 그냥 눈감고 봐주는 것이다. 다른 마음이 되받는다. 여기는 세계 와인의 메카이다.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요즘 우리나라에도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난 3월에 우리 (대전)고등학교 (서울) 동문 모임에서, (박수전)회장이 유명한 와인강사를 초빙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런 동기들에게 내가 와인의 본 고장의 유명한 와인 농장까지 가서, 시음을 해보았다면, 얼마나 폼날 것인가?

 

속세적인 마음은 변명할 거리를 계속 찾는다. 굳이 예수님을 팔아 모면 할 수 있으려나. 나사렛 예수는 갈릴래아 지방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첫 번째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는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잔치 도중 포도주가 떨어졌다.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일렀다. 예수는 물로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들었다. 그래서 어머니 친척의 혼인 잔치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갖기도 했다.

 

하찮은 나의 개인적인 순례 여행에 거룩한 예수를 끌어들이는 것은 내가 보아도 멋쩍다. 범신론을 주장한 선배 철학자 스피노자라면 어떨까? 그는 말한다. “어떤 신이든 인간이든 악한 존재가 아닌 이상, 역경과 고통에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 그는 눈물이나 한숨, 공포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히 반대다. , 우리가 즐거워할수록(바꿔 말하면 우리가 신의 본성에 더욱 참여할수록) 완전한 곳을 향하여 더 높이 올라간다. 내 말을 들으라. 맛 좋은 음식과 술에서 힘을 얻고, 즐거워하는 것은 현자다운 행동이다. 속세의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운 장식품에서, 음악과 놀이에서 기뻐하는 것도 현자다운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지혜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

 

기차가 한 시간을 달리니 푸아티에서 섰다. 여기서 한 180cm 정도 되는 미남 청년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 (앙뜨앙 브와종 )와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30세이고, 지금은 옛 고성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건축일을 하지만, 원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며, 지금 애인은 아프리카에서 농업지도를 하고 있어 일 년이 한번 밖에 만날 수 없다고 한다. 내가 보르도에서 한나절 방문할 유명한 와인 농장을 소개해달라고 하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보르도에서 기차로 30분 떨어진 생떼밀리옹(Saint-Emilion)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추천한다. 거기에는 고성들이 많고,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고급 음식점들이 여럿 있으며, 사실 자기는 그곳에서 지금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음식점도 소개하고, 기차 시간도 알려주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적어주는 친절을 보인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1박은 결코 와인 농장이 아니라, 프랑스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필요하다. 나는 보르도에서 2박하기로 결정했다. (2024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