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늙어감에 대하여 8
구녕 이효범
종교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그 정체는 무엇인가? 불교는 인간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아(無我)이며, 불생 불멸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죽으면 심판 이후에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든지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유교는 인간은 하늘로부터 선한 본성을 부여받았으며, 극기복례(克己復禮)할 것을 주장한다. 노장사상은 인간은 도에서 출현하였으며 무위자연(無爲自然)할 것을 주장한다. 동학은 인간은 한울님이며 시천주(侍天主)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종교들은 우리에게 겁을 주기도 하지만 죽음에 대한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삶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죽음이 그리 무섭지 않을 수 있다. 『토지』라는 한국 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소설을 쓴 박경리는 노년에 ‘옛날의 그 집’이라는 시를 섰다. “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 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죽음을 보는 박경리의 태도는 어른처럼 의젓하다. 그녀는 오히려 행복하게 이 세상의 퇴장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여 평강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하이데거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처럼, 죽음과 정면승부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음을 피동적으로 맞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죽음에로 앞서 달려 나가면, 세상의 익명성에 빠져 잡담이나 일삼는 퇴락한 삶을 살지 않고, 본래적 실존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현존재(인간)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대부분 일상화된 관심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그런 세계에 몰입해 있음은 세상 사람의 공식성 속으로 상실된 존재의 성격을 대부분 갖고 있다.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 존재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늘 이반되어, 세상 속으로 함닉되어 있다. 세상 속으로의 함닉성은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모호성으로 이끌려진 공동 존재 속으로의 몰입을 의미한다.”
퇴락한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찾아야 할 나의 본래적인 실존의 모습은 무엇일까? 동양의 수행자들은 고양이가 쥐잡듯이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런 도를 체득하려고 정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었다. 인도의 아리안족들은 노년이 되면 집안의 모든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한다. 우리도 노년에 몸은 비록 세속에 살면서도 정신은 이런 수행의 길을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죽음은 완전한 종말이 아니고 하나의 세상의 끝이다. 우리가 사람의 몸으로 와서 이 세상을 여기저기 구경한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경험이었으며 행운이었다. 그러면 족하지, 만만세세 이 세상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천하의 절경도 한 번이면 된다. 그것을 다시 보는 일은 오히려 지루하고 지겹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무한하게 산다는 것은 축복도 아니고 장수로서도 의미가 없다. 긴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하루의 이야기가 일상의 이야기보다 더 길 수가 있고, 박진감이 있고,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말했다. 영원한 한 편의 시를 남기는 것이 생명 없이 사라지는 천 편의 시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 그것이 진정으로 장수하는 길이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전 세계를 찾아다녔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생명과학은 불로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또 앞으로 어떤 세대부터는 죽지 않고도 영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죽지 않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고 저주이다. 그리고 그런 탐욕은 진시황의 시도처럼 생명의 평등성을 훼손하는 일이며, 다음 세대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 만행이다. 그래서 그런 과학적 시도는 정의의 이름으로 파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열매를 맛보려는 거부(巨富)들을 인류의 이름으로 사살해야 한다. 히틀러나 푸틴보다 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멋지게 나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 세상이 어떤지는 지금 알 수 없다. 직접 가봐야 한다. 하나의 강물이 흘러 바다에 들어가면 강은 소멸한다. 그러나 바다는 얼마나 광대무변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이냐! 생명이 너울대는 환희의 세상, 우리의 다음 세상도 그럴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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