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10) 존 스튜어트 밀을 찾아서 2

이효범 2023. 5. 4. 08:25

o (10) 존 스튜어트 밀을 찾아서 2

 

구녕 이효범

 

밀은 1821년 프랑스에서 1년간 체류한 후에, 아버지가 준 듀몽(Dumont)입법론을 통해서 벤담을 처음 읽었다. 이 책은 벤담의 중요한 사상을 불어로 해설한 책이다. 이 책으로 밀은 내 정신 발전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마치 그곳으로부터 넓고 넓은 정신세계의 전모를 굽어볼 수 있고,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고 먼 데까지 여러 가지 지적 성과물이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는, 어떤 고지에 올라섰음을 느꼈다. 그리고 더 깊이 연구함에 따라, 이 지성의 명쾌함에 더하여, 인간사회의 실제적 개선의 가장 유망한 앞길이 내다보이는 것 같았다.”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 功利主義)를 계승했다. 벤담은 영국 사회가 전통과 관습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회적 공리를 극대화시키지 않는 제도와 관습을 과감히 타파하려고 하였다. 밀의 평가에 의하면 그는 이론과 제도 모두의 측면에서 영국 개혁의 선구자였다. 벤담의 시대에는 양 한 마리를 훔치면 교수형에 처했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상냥한 마음을 지닌 벤담은, 양을 훔친 도둑을 교수형에 처하는 세상과 3개월의 징역에 처하는 세상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가를 묻는다. 만약 3개월 징역이 양 도둑을 방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고, 교수형이 초래할 행복의 손실을 고려한다면, 교수형을 그만두는 편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벤담은 모든 사람의 행동이 고통의 회피 또는 쾌락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고대 에피쿠로스 같은 쾌락설을 주장한다. 그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에는 유명한 문장이 쓰여져 있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지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고통과 쾌락뿐이다. 한편에서는 선악의 기준이, 다른 한편에서는 인과의 사슬이 이 옥좌에 걸려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거나 말하고 사고하는 것 모두를 지배한다.”

 

이런 쾌락설에 벤담은 유용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utility)’를 첨가한다. 유용성의 원리는 사람의 행동을, 그 행동이 미칠 관계자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졌느냐 아니면 감소하는 경향을 가졌느냐에 따라, 시인하거나 비난하는 원리이다. “유용성의 원리란, 모든 행위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혹은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고 평가하는 원리다. (----) 내가 모든 행위라고 말한 뜻은 그것이 한 개인의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정부의 모든 정책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리란 어떤 대상 속의 성질로서, 그것이 관련된 당사자에게 이익.편의.쾌락..행복을 가져다주고 손해.고통..불행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당사자가 사회 전체일 경우에는 사회의 행복을, 특정한 개인일 경우에는 그 개인의 행복을 가리킨다.”

 

쾌락설에 유용성의 원리를 첨가하면, 영국(벤담) 공리주의의 저 유명한 명제,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유용성의 원리에 부합하는 행위를 마땅히 해야 할 행위 또는 적어도 해도 좋은 행위라고 언제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만이 옳은(선한) 행위이다.

 

그런데 벤담은 행복을 쾌락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든 쾌락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양질이나 저질의 쾌락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쾌락의 양()만이 문제가 된다. 사람의 행동이 가져온 쾌락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꾸로 고통의 양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행동은 관련된 사람들의 시인을 받고, 또한 도덕적으로 옳은(선한) 행위가 된다.

 

양적 쾌락만 주장한 벤담의 공리주의는 우리의 상식과 반하고 곧바로 밀의 비판을 받았지만, 벤담이 그렇게 주장한 것에는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무비판적으로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의사결정이 어렵게 때문이다. 그런데 의사결정이 어려운 것은 그들이 갖는 무수한 욕구나 목적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 그것을 조정하고 해결해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목적들의 우열을 비교하여 합리적인 인생 계획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모든 다른 욕구나 목적에 우선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욕구 혹은 지배적 목적(dominant end)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배적 목적은 인간적인 여러 가치에 배치되지 않고, 우리의 도덕적인 감정(도덕감)이 용납하는 한에서, 객관적인 계량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즉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서, 원리상 그 존부다소(存否多少)가 실증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벤담은 사람의 지배적 목적으로 쾌락을 발견했고, 쾌락을 양적으로 계산하려고 했다. 벤담은 쾌락의 양을 계산하기 위한 방법(hedonistic calculus)을 제시했다. 강도(intensity), 지속성(duration), 확실성(certainty), 근접성(propinquity), 다산성(fecundity), 순수성(purity), 범위(extent) 라는 척도가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나 정책을 선택할 때, 그것들이 가져올 결과를 이런 방법으로 계산하여, 관련된 사람들의 최대 쾌락을 가져오는 것을 선택하면, 최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