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서1

이효범 2023. 1. 9. 07:57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서1

 

구녕 이효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ph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은 현대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을 일으킨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적으로도 도발적이었지만, 삶에 있어서도 동양의 수도승처럼 기인(奇人) 같은 모습을 보였다. 나는 현자(賢者)들을 찾아가는 이 연속적인 글에 비트겐슈타인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여러 번 망설였다. 하지만 그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동성애적 성향을 극복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평생 고군분투한 점, 그리고 독신으로 외롭게 살았음에도 죽음을 앞두고 멋진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 점을 참조하여, 다루어 보기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8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세기말 빈은 르네상스를 일으킨 피렌체처럼 지적 문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빈은 시오니즘과 나치즘의 탄생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개발한 곳,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가 예술의 유겐트슈틸을 일으킨 곳, 쇤베르크가 무조 음악을 개발한 곳, 아돌프 로스가 근대 건축물을 특징짓는 삭막하며 기능적이고 무장식의 건축양식을 선보인 곳이었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옛것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형제 5명 중 3명은 자살했다. 그 중 배우가 되고자 했던 루돌프 형은 동성애로 고민하다가 청산가리를 먹었다. 최고 상류층 자제인 비트겐슈타인은 명문학교를 마다하고, 중하층 계급의 자녀가 다니는, 린츠에 있는 직업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실업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는 같은 나이였지만 학년은 2년 아래인 학생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 세계 최고의 지성과 세계 최악의 독재가 같은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 후 비트겐슈타인은 기계공학에 관심을 가져 맨체스터에서 항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수학의 기초에 관심을 가져 기호논리학을 정립시킨 독일의 프레게(Gottlob Frege)에 갔다가, 그의 추천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버트란트 러셀에게 갔다. 두 천재의 만남으로 분석철학은 시작되었다. 러셀은 회고한다. “그는 기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특이해 보였어요. 학기 내내 나는 그가 천재인지 아니면 단순한 괴짜인지 판단하지 못했어요. 그는 게임브리지에서 지낸 첫 학기가 끝나갈 때쯤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단순한 멍청이인지 아닌지를 말해 주실래요? 내가 단순한 멍청이라면 그냥 비행사나 되렵니다. 그게 아니라면 철학자가 될 거고요.’ 나는 그에게 어떤 철학적 주제에 관해서 방학 중에 뭔가를 써와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써오면 그가 단순한 멍청이인가 아닌가를 말해주겠다고 하면서요.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내가 제시했던 것을 완성시켜서 가져왔더군요. 나는 딱 한 줄만 일고 바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안 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네.’ 그리고 그는 비행사가 되지 않았지요.”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논리학 연구를 하다가 대학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노르웨이의 외딴 곳에 가서 혼자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탈장 때문에 징집이 면제되었음에도, 강력하게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에도 격렬하게 사유를 지속하여 그의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논고)를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철학연구를 중단하고, 교직을 이수한 후, 오스트리아 산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전쟁 후 그에게 남겨진 막대한 유산은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도 기부했다.

 

그의 책이 오스트리아의 빈 학파(논리실증주의)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적 논의의 중심이 되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철학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1929년 케임브리지로 다시 돌아왔다. 그 때 그의 평생 친구 중의 하나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 도착했다.”는 말로 이 소식을 전했다. 그의 강의는 완전히 형식에서 벗어나 노트 없이 수업을 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격렬한 탄성을 내기도 했다. 교수가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수업이 아니라 그야말로 철학적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제자인 말콤(Norman Malcolm)은 회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엄격함은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끊임없이 가장 심오한 철학문제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 또 다른 문제로 연결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못견뎌 했다. 그는 맹렬하게 자신을 채찍질했으며, 그의 전존재는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그의 강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자신의 지력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도 최대한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순수하고도 가차 없는 정직함의 일면이었다. 선생으로서나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나 그를 경외스럽고 심지어는 무서운 사람으로 만든 것은 주로 타인은 물론 자신도 용서치 않는 그의 무자비한 완전벽 때문이었다.” 후에 말콤이 철학교수가 되었을 비트겐슈타인은 편지를 한다.“자네가 자네 자신이나 자네의 학생들을 기만하는 일이 없기를 빈다는 말일세. (---) 그러지 않기란 매우 힘든 일이 될 걸세.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 그럴 경우에는 과감히 떠날 수 있기를 바라네.”

 

38년간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은 늘 내 가슴을 억눌렀다. 그러나 나는 소심해서 65세 정년 때까지 과감히 대학을 떠나지 못했다. 퇴직 후 명예교수에게 주어진 강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나는 조금의 위안을 삼고 있다. 1935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에 심취한 비트겐슈타인은 소련의 집단 노동자가 되기 위해 레닌그라드에 갔지만, 당국이 대학의 철학과장직을 제의하는 바람에 실망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죽음 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나머지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쏟았다. 이 책은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