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존 롤즈를 찾아서10
구녕 이효범
롤즈에 대한 가장 심각한 비판은 공동체주의로부터 나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마이클 왈처(Michael Walzer),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등이다. 이들은 롤즈 같은 자유주의가 개인의 파편화를 초래하고, 공공(公共)의 선(善)이라는 개념을 무시하고, 덕을 상실하게 하였다고 비판한다. 매킨타이어는 1981년 쓴 『덕의 상실(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ory)에서,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서 무지의 베일에 쌓인 채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계약하는 존재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의 계몽주의적 도덕의 기획은 실패로 끝나고, 서양의 현대는 도덕의 불일치와 주관성, 그리고 상대주의가 극에 달했다. 사회는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된 사회(fragmented society)로 변모했다.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관료제적 합리주의가 만연하여 ‘성공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유령적 자아’가 산출되었다. 이런 유령적 자아는 자신이 처해 있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유한한 인간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적 콘텍스트를 부정하는 자아는 유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매킨타이어에 의하면 이야기 하는 존재이다. 나는 내가 되기로 선택한 자발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아를 이야기 양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두 가지를 요청한다. 이야기를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자아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 한 역사의 주체적 존재(행위들에 책임을 지는 존재)여야 한다. 자아는 책임을 지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존재이다. 개인에 있어서 선은 이야기의 통일성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인간 전체에게 있어서 선은 개인적 삶의 통일성을 완성하는 최선의 방식들의 공통적인 어떤 것이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삶이란 주변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몰입하고, 노동을 통해 본성을 표현하는 지평인 동시에, 한 개인의 선이 그의 생전부터 사후까지 지속되는 더욱 커다란 기획에 연계되는 지평이다. 삶이란 특정한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서사적 탐색을 규정하는 것이다. 테일러와 샌델도 ‘방해받지 않는 자아(unencumbered self)’와 ‘얽매이지 않는 자아(disengaged self)’는 자아아가 극단적으로 해체되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마저 상실한 추상화된 자아라고 말한다. 그러 자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샌델은 롤즈가 전제한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이성적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비판한다. 롤즈는 언제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공략될 수 없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은 공동체의 가치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된 개인의 존재를 전제한 개념이다. 공동체란 개인들의 합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인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졌으며, 개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의 가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가지고, 반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율적인 삶의 자세는 중요하다. 그러나 자율성은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율적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다.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도덕성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도덕교육은 공동체의 가치나 공동체의 의식(구성원들 간의 상호보살핌의 마음과 규범을 준수하려는 자세) 을 강조해야 한다.
롤즈가 현대 사회에 정의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지만, 이 문제는 롤즈에 의해 해결되었다기 보다는 다시 논쟁이 점화되는 모습이다. 공동체주의자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3가지 방식을 논한다. 첫째가 공리주의적 시각이다. 이것은 정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결정하려면,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전체적인 행복의 양을 증가시키는 행위가 정의로운 행위이다. 둘째로 자유주의적 시각이다. 이것은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킨다. 정의는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즉 정의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 중에 노직처럼 자유방임주의(자유시장주의자)는 정의란 성인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데 달렸다. 그러나 롤즈처럼 공평주의(평등을 옹호하는 이론가)는 규제 없는 시장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정의를 구현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바로잡고 모든 이에게 성공할 기회를 공평하게 나눠 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미덕(美德)과 최선의 삶에 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서, 각자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이론은 18세기 칸트로부터 20세기 롤즈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이다. 셋째는 미덕장려의 시각이다. 정의는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다. 재화를 분배해서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도덕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발상은 자유주의 사회 시민들이 보기에, 자칫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상황을 불러올 수 있는 경악할 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거라고 주장한다.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결정하려면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주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부터 심사숙고해야만 무엇이 정의로운 법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법은 좋은 삶을 묻는 질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
카렌 레바크(Karen Lebacgz)는 『정의에 관한 6가지이론』에서, 앞에서 본 분배적 정의에서 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이 응분의 몫을 결정하는데 8개의 범주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 이외에 무엇인가가 더 첨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응당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때, 만일 ‘각자에게 ---에 따라’ 정해야 한다면, 정의에 관한 많은 이론들이 불일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공리주의자 밀(J.S.Mill)은 ‘각자에게 전체적인 공리를 극대화하는 행위의 경향에 따라’ 결정해져야 한다. 롤즈는 각자에게 가장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기본 구조에 따라(평등한 정치적 권리, 평등한 기회, 미래 세대를 위한 올바른 저축 등에 의해 설정된 한계 내에서)’ 결정해져야 한다. 노직은 ‘각자에게 그들에게 권원(權原)을 부여한 선택에 따라’ 결정해져야 한다. 카톨릭 주교들은 ‘각자에게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따라’ 결정해져야 한다. 해방신학자 미란다(Jose Porfirio Miranda)는 ‘각자에게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신의 역사에 따라’ 결정해져야 한다. 이들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들에 의하면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을 유리하게 하는 것,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의이다. 그들의 주장은 서로 상충하기도 하고 일치하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정의는 무엇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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