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존 롤즈를 찾아서1
구녕 이효범
존 롤즈(John Bordley Rawls, 존 롤스, 1921~2002)는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서, 40년 동안 ‘정의’라는 한 주제만을 파고 든 위대한 미국의 철학자이다. 그는 하버드대학 학생들로부터 ‘하버드의 현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1971년에 출판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다. 이 한권의 책은 영미(영국과 미국) 윤리학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서양 철학은 현대에 들어와서 크게 대륙(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는 현상학이 유행했고, 영미에서는 분석철학이 지배했다. 철학의 한 분야인 윤리학도 이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는 분석윤리(analytic ethics)가 지배적인 사조가 되었다. 분석윤리는 메타윤리(meta-ethics)라고도 한다. 메타윤리는 보통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영국 캠브리지 대학 교수였던 무어(G.E. Moore, 1873-1958)의 『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기존 서양 윤리학의 주류는 규범윤리학이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라는 당위(當爲, 규범)의 문제를 다룬다. 그래서 윤리학은 도덕현상을 단순히 기술(記述)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의 원리를 밝히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에게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목적 내지 법칙이 주어져 있어, 그것으로 도덕적 행위를 평가하고, 도덕 판단의 진위(眞僞)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종래 윤리학은 그런 목적이나 법칙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심 없는 사실로 믿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사람의 도덕적 행위의 시비(是非)를 평가하는 발언이,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는 과학적이거나 경험적 진술처럼, 참되고 거짓이라고 밝힐 방법이 있느냐, 하는 것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다. 규범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이 가능하려면 도덕적 평가의 기준이 확립될 수 있어야 한다, 즉 도덕 판단의 진위를 가릴 표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는, 신학처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인 윤리학이 학문으로서 가능하냐를 묻는 것이다. 윤리학에서 다루는 진술이나 명제가 끝내 참과 거짓으로 밝혀질 수 없다면, 그것은 학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전통 윤리학처럼, 어떤 사람이 살아갈 규범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을 세운 윤리체계가 진실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윤리학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무어는 윤리학의 과제를 ‘‘선(good)’이란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규범윤리학에서 다루는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선’과 ‘옮음(right)’이다. 그런데 무어가 볼 때, 기존의 규범 윤리설들에서는 이 개념을 윤리체계의 기초로 삼고 있는데 반해, 그 의미는 모두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창하게 기존 사상가처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다시 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윤리적 개념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어가 했던 작업은 도덕적 규범을 찾는 일이 아니라, 윤리적 언어를 분석하는 일이었다. 즉 기존의 규범 윤리설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사용한 윤리적 언어를 비판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기존 윤리학에 대한 윤리학인 셈이다. 그래서 무어의 윤리학을 분석윤리학 혹은 메다 윤리학이라고 부른다. ‘메타(meta)’라는 말은 ‘~ 뒤에’, ‘~너머에’, ‘~를 초월하여“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메타 윤리학이 영미권을 50년간 지배했다. 이런 윤리학의 흐름이 전혀 공과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기존 윤리학을 반성하고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윤리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기류가 더 강했다. 윤리적 추론을 과학적 추론처럼,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추론으로 입증하려는 피나는 노력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분석윤리학은 피로했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 했다. 그리고 윤리학자들이 상아탑에 갇혀 자기들의 내적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동안, 바깥세상은 윤리학적 대안을 수없이 요구했다. 베트남전쟁, 흑인인권문제, 양성평등문제, 세계기아문제, 환경문제, 생명공학과 정보화문제 등 다룰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학문의 중심인 하버드대학에서, 정의의 문제를 들고 나온 존 롤즈는 일대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오랫동안 분석윤리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분석윤리학적 논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양 규범 윤리학의 핵심 개념인 정의를 다시 논의의 중심으로 끌고 온 것이다.
'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롤즈를 찾아서3 (0) | 2022.12.31 |
---|---|
존 롤즈를 찾아서2 (0) | 2022.12.30 |
혜능을 찾아서4 (1) | 2022.12.26 |
혜능을 찾아서3 (0) | 2022.12.25 |
혜능을 찾아서2 (0) | 2022.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