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부모와 자녀 사랑에 대해서 5)
구녕 이효범
둘째, 동정심을 길러준다.
세상은 강자가 지배하지만 강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알렉산더나 칭기즈칸도 강자이지만 간디나 만델라도 강자이다. 사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강자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류를 위해 공 헌한 강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를 파멸시킨 강자들이다.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갈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동정심의 유무(有無)라고 생각한다.
동정심은 타인과 공감(sympathy)하는 마음이다. 타인이 고통을 받으면 나도 고통을 받고, 타인이 즐거우면 나도 즐거워하는, 동고동락하는 정신이다. 이것을 유교에서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고 한다. 불인지심은 남의 불행을 마음 편하게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연민의 마음이다.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려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깜짝 놀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과 친구들로부터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맹자는 이런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더 나아가, 인간은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선하다면, 인간의 악한 행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맹자에 의하면 그것은 본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산(山牛)의 목(木)을 들어 이 점을 비유하고 있다.
“우산의 나무는 일찍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큰 나라 수도의 교외에 있는 관계로 도끼로 그 나무를 찍어 댔으니 어찌 아름다워질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고 우로(雨露)의 윤택을 받아 싹이 돋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소와 양을 끌어다가 또한 그것이 자라는 족족 먹이고는 하였다. 그래서 저렇게 빤빤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 빤빤한 것을 보고는 거기에는 일찍이 재목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사람에 속해 있는 자로서 어찌 인의의 마음이 없었겠는가? 자기의 양심을 내버리게 하는 일은 또한 도끼로 나무를 다루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매일매일 찍어 내는데 아름다워질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양심이 자라나고 이른 아침의 맑은 기운이 일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남과 가까운 점이 어찌 적기야 하겠는가마는, 낮에 하는 행위가 또 그것을 뒤섞어 없애 버린다. 그것을 뒤섞기를 되풀이하면 밤사이에 길러지는 기운이 남아있지 못한다. 밤사이에 길러지는 기운이 남아있지 못하면 짐승과의 거리가 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짐승 같은 것을 보고서 그에게는 본성이 있어 본 일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사람의 성정(性情)이기야 하겠는가.”(맹자, 告子 上)
맹자는 본심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본성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의 본성을 기른다는 것은 인간이 눈, 귀, 코, 혀, 피부라는 오관(五官)의 욕망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문화적이고 이성적인 욕구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확충한다는 의미이다. 인의예지의 확충이란 인간 심리의 깊숙한 밑바닥에 숨어있는 사단(四端)을 드러나게 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이 대인(大人)이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무왕은 마치 한 사람이 천하를 횡행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정신을 가졌다.
이런 대인은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와도 통한다. “천하의 넓은 곳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지위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한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해도 홀로 그 도를 행한다. 부하고 귀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가난하고 낮은 위치에 있어도 지조가 변하지 않으며, 위협과 무력에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이를 일컬어 대장부라 칭한다.”(맹자, 등문공 하)
우리의 동학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득도(得道)의 신비체험을 통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한울님의 마음이 곧 수운의 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 자신 속에 한울님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 지고한 존재를 지극히 모실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그런데 수운의 대를 잇는 제자 해월 최시형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한울님이 아무리 고귀해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한울님의 수많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양천주(養天主) 사상이다. 동학에 의하면 결국 모든 인간은 한울님이다. 인내천(人乃天)이다. 노비나 양반이나 똑같이 평등한 인간이다. 누구 하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동학처럼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강하게 나타내는 사상도 없을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세계정세를 보라. 러시아 푸틴이야말로 히틀러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강자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류에 대한 연민을 볼 수 없다. 오직 불타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자기 과신만 있을 뿐이다. 이런 강자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인류의 재앙이다. 푸틴의 독선으로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하고, 자기 나라 병사들도 개죽음으로 몰리고 있으며, 전쟁과 아무 관련이 없는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푸틴의 두 딸과 연인들은 사치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현재 세계의 모든 나라가 받아들이고 있는 자본주의는 공감 능력을 더욱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황금에 대한 욕망을 죄악시 하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긍정한다. 부자도 얼마든지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의하면, 개인의 자기 이익은 경쟁 시장에서 사회 전체에 최고로 좋은 상태를 가져온다. 경쟁이 개인들로 하여금 남들보다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하고, 더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내가 만일 자동차 제조업자이고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나는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차를 더 잘 만들어서 더 싼 가격으로 팔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나도 이익이지만, 그것은 고객들에게도 이익이다. 따라서 나의 자기 이익은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최상으로 이끈다. 스미스는 이러한 이득을 ‘보이지 않는 손’의 결과라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무한 경쟁은 칼 마르크스가 질타했듯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결과를 가져온다. 미국의 월가에 종사하는 극히 적은 사람들의 탐욕은 세계의 부를 왜곡시킨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공감(sympathy)을 논한다. 공감은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을 통해 지나친 이기심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가 그린 자본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벤자민 프랭크린이 보인 정신이다. 그는 이윤추구를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일치시켰다. 그리고 평생 동안 모은 부(富)를 자기 쾌락으로 탕진하지 않고 사회로 환원했다. 그것이 그는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분야이건 간에 선한 강자들이 자기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이 우리의 삶을 기름지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강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은 타고난 재능처럼 우연한 것들이고, 어떤 것은 사회가 베푼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자는 겸손하게 그 강함에서 얻은 이익을 약자와 나누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정의 사회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 아이 때부터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계발시켜줄 뿐만 아니라, 인류가 하나라는 깊은 공감의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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