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부모의 자녀 사랑에 대해서 4)
구녕 이효범
철학자로서 나는 앞에서 말한 것들을 참고로 해서, 이 시대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자녀를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사회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길러낼 것인가를 모색해보려고 한다.
첫째,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녹녹치 않음을 자각시킨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이육사는 ‘광야’라는 시를 썼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가 꿈꾸는, 우리 민족이 처한 노예와 같은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광복 후 찬란한 미래에 백마 타고 올 위대한 초인은 누구일까?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다. 그런데 미래의 인간상으로 ‘초인’을 강조한 사람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이다.
니체는 그리스 초기의 강건했던 서양의 문명이 플라톤적인 초월의 이념과 기독교적 신앙, 그리고 약자들을 위한 가축의 도덕으로 말미암아 쇠퇴했다고 진단한다. 그것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고, 도덕도 유약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간교한 속임수에 불과한데,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그것들에 속아 이 땅에서의 생을 부인하고 학대하는 등 자학적 삶을 살아왔다. 그 결과 인간은 그 자체로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비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서양 몰락의 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명의 정점에 군림하는 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신의 죽음과 기존 도덕이 붕괴되니까 역설적이게도 지금까지 인간이 추구해온 인생의 최고 목표와 가치가 상실되었다. 또 목표와 가치를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극단적 감정에 빠지게 되었다. 이 극단의 감정이 바로 끝을 알 수 없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이다. 인간은 이 허무주의로 인해 파멸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신의 죽음과 도덕의 극복을 통한 인간의 해방은 거꾸로 재앙이 될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을 극복한 인간은 이 허무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을 극복하는 지난(至難)한 길은, 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극적 자유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유로 전환해서,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가,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신과 도덕을 극복한 용맹스런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즉 티 없이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처럼 자연으로의 복귀가 정답이다. 그럴 때 자연은 모든 존재 의미와 가치의 근원으로 복권되며, 이 대지가 신을 대신해서 최고 권좌에 등극하게 된다. 이렇듯 자연으로 돌아가 이 대지와 그 위에서의 삶을 모든 존재 의미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삼는 인간, 니체의 초인(위버멘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건강하고 정직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자연으로 복귀를 소망하게 되지만 우리가 돌아갈 자연은 루소처럼 순수하고 순진무구할망정,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산은 절대 아니다. 자연은 ‘힘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고 있는 거친 힘의 세계이다. 격한 싸움으로 되어 있는 불화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런 세계에서는 힘에의 의지를 체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살벌하고 가공할만한 세계가 실재이다. 그런 세계를 사람들은, 이를테면 그리스도교도나 플라톤주의자들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신앙으로 뛰어넘으려 했다. 루소와 같이 심약한 사람들은 자연세계를 미화해 그곳으로 도피하려고 했다. 또한 전통 형이상학을 부정한 헤겔도 실제적으로는 절대정신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그 뒤를 잇는 헤겔 좌파인 포이어바흐나 마르크스도 이상적인 시민사회나 공산주의 같은 허망한 미래의 장밋빛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이 거칠고 조야한 자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니체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 곧 힘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촉구한다. 이렇듯 잔인한 자연으로 돌아가 힘에의 의지를 삶의 방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인간이 곧 위버멘쉬다.
우리는 축구선수 손흥민을 좋아한다. 그가 뛰고 있는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를 보라.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를 잘하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들이 축구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축구의 세계를 빛나게 한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보면 그리스 초기도 수많은 영웅들이 지배한 투쟁의 세계였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진면목이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은 끝없는 투쟁이고 고통의 연속이다. 타인과 경쟁하는 것도 피를 말리는 일이고,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는 것도 뼈를 깎는 고행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이런 생을 오히려 사랑하고,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난 자유인으로서 기꺼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즐긴다면, 이런 삶도 한 번은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고난을 극복하고 영웅이 되어보는 삶은 참으로 의미 충만하고 멋진 인생일 것이다. 부모는 이런 삶의 실재를 과감 없이 자녀들에게 교육시켜야 한다.
부모의 자녀 사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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