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명예와 자유를 위해서 키워 갈 때에 그 연약한 마음을 폭력으로 교육하는 일에 나는 반대합니다. 모질고 엄하고 강제적인 교육에는 무엇인지 노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과 예지와 숙련으로 되지 않는 일은 결코 폭력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기억하기로 나는 소년지절에 단 두 번, 그러도 아주 부드럽게밖에 매 맞은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도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젖먹이 때에 죽었습니다만, 이런 불행을 면한 외동딸 레오노르는 제 어미가 너그럽게 길러서, 그 아이의 어린아이다운 잘못에 아주 순한 말로만 벌주었으며, 다른 징계나 지도를 받지 않고 여섯 살이 되도록 컸습니다. 여기 내가 원하는 것보다 실망적인 결과가 되었다 해도, 그것은 정당하고 자연스런 것으로 내가 믿고 있는 교육 방법 탓이 아니고, 거기는 나무라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내게 사내자식이 있었다면, 나는 좀더 엄격하게 키웠을 것입니다. 남자란 좀더 자유로운 처지로 향하려는 것이니 이 점에 더욱 신중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이 호방하고 솔직하게 커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나는 매질하는 일이 마음을 더 비굴하게 만들거나 심술궂은 고집쟁이로 만드는 것밖에 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일까요? 그들에게 우리가 빨리 죽기를 바라도록 맺어진 인연을 없애고 싶은 것일까요? (이러한 가증할 소원은 정당하거나 용서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범죄도 당위성 위에 세워질 수 없다.”(티투스 라비우스) 우리는 그들의 생활을 우리 힘에 닿는 한, 이치에 맞게 조절해 주어여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나이가 그들의 나이와 거의 혼동될 정도로 젊어서 결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처사는 불편하게도 우리를 여러 가지 곤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특히 생활 조건이 한가롭고, 수위 연금으로만 살아가는 귀족들을 두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벌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많은 어린애들을 같이 데리고 산다는 것은 살림살이의 구성 요소가 되며, 그만큼 새 일꾼이 생기고 벌어들이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35세 결혼설에 찬성합니다. 플라톤은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55세 뒤에 결혼을 하려는 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소생은 먹여 살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옳습니다. 탈레스는 여기에 진실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모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넘은 다음에는 이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귀찮은 행동에는 좋은 기회를 거절해야 할 일입니다. 옛날 골르 인들은 20세 전에 여자를 안다는 것을 아주 책망 받을 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전쟁을 위해서 훈련받는 남자들에게는 여자와 짝지음으로써 용기가 물러지고 흐트러지기 때문에, 상당히 나이가 들도록 그들의 동정을 지키도록 장려했습니다. “그때엔 젊은 처와 결합되고, 아이를 갖는 기쁨과 부친과 남편으로서의 애정에, 그의 용기가 약화된 것이다.”(토르카토 타소)
그리스 역사는 타렌툼 인 이코스, 크뤼손, 아스튈로스, 디오폼포스 및 많은 선수들이 올림픽 경기 때의 경주와 씨름과 기타 경기에서 그들의 신체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훈련이 계속되는 한 모든 종류의 사랑의 장난을 삼간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황제 카를 5세가 다시 자기 나라에 복귀시킨 튀니스 왕 몰래 핫산은 자기 부친이 여자를 너무 찾아다니던 것을 추억하며 비판하여, 그를 느림보니, 여자다우니, 어린애 제조장이니 하고 불렀습니다. 스페인령 인도의 어느 나라에서는 남자들에게 40세가 되기 이전에는 결혼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소녀들에게는 10세에 허가하였습니다. 35세 되는 한 귀인의 나이는 아직 20세 되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시기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나가며, 전쟁으로 떠나며, 임금님의 궁정에 나가야 할 나이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몫이 필요하고, 그것을 확실히 따로 가져야 할 일이며, 타인을 위해서 자기 것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부친들이 보통 입에 담는, “나는 자러 가기 전에 옷을 벗고 싶지 않다”는 대답은 이런 경우에 바로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친이 세월과 불행에 지쳐서 몸이 허약할 대로 허하여 건강이 말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도 얻지 못하며, 산더미 같은 재물을 쓸데없이 혼자 품고 있는 것은, 자기에게도 그에게 딸린 가족에게도 잘못하는 일입니다. 그라 현명하다면, 잠자리 가려고 옷을 벗을 때가 되었습니다. 셔츠까지 벗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더운 잠옷쯤은 벗어야 합니다. 화려한 생활의 나머지는 이제 소용없는 터이니, 그런 것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차지해야 할 자들에게 기꺼이 선사해야 할 일입니다. 자연이 그에게서 그런 ㄹ것을 빼앗아 가니, 그들에게 그 사용권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는 악의와 시기심이 있습니다.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제2권, 8,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에 대하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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