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알프스 3대 미봉 트레킹(8)
구녕 이효범
어제는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알프스를 넘어 근대 등산의 발생지인 샤모니(Chamonix)에 왔다. 2000m 정도의 알프스 고개를 전용버스를 타고 속리산 말티재처럼 아슬아슬 넘으니, 갑자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생각났다. 그는 이곳 주변 어딘가를 넘었을 것이다. 초겨울 알프스 산맥의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으면서 한니발은 그 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도 혹독한 피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보병 3만 8천명은 2만으로, 기병 8천기는 6천기로 그리고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잃었다. 그는 9일 만에 고개 정상에 올랐고, 이틀 정도 군사들을 휴식시킨 뒤, 15일에 걸쳐 하산하였다. 그런 알프스를 우리는 30분 만에 한니발과는 반대 방향으로 넘었다. 한니발처럼 우리의 알프스 원정도 우리 일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8시에 호텔에서 나와 락블랑(Lac Blanc) 트레킹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스위스와는 달리 현지법에 따라 가이드 두 사람이 붙어 안내를 시작했다. 락블랑 가는 루트는 여러 개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일 2만보 정도를 걸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래서 중간 난이도를 선택하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샤모니 계곡 넘어 몽블랑 연봉들을 바라보며 왼쪽 산맥 허리를 걷는 일정이었다. 여기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주변은 스위스에서 보지 못했던 묘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침탑(바늘)들을 연달아 높이 세워놓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4000m 급의, 설악산 권금성 같은 뾰족한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있었다. 눈을 돌리기 어려운 묘한 장관이었다.
눈은 주로 오른쪽으로 두고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드디어 우리는 오늘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2352m의 락블랑에 도착하였다. 락블랑은 ‘하얀 호수’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파란 호수로 두 개의 호수가 아래와 위로 이어져 있었다. 이름은 예전에 하얀 빙하가 호수 위를 덮었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빙하는 아주 사라졌고, 호수 위쪽으로 눈이 약간 존재할 뿐이다. 지구의 온난화로 알프스의 모습도 예전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다. 올해는 심한 가뭄까지 덮쳐 락블랑의 호수도 많이 줄었다고 프랑스 가이드는 아쉬워했다. 아름다운 락블랑 호숫가에서 소풍 온 아이들처럼 도시락을 까먹고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러 샤모니 중심의 식당으로 나가면서, 샤모니를 상징하는 두 개의 동상을 보았다. 하나는 발마 광장에 먼저 세워진 과학자 오라스 소쉬르와 수정 채굴업자 자크 발마(Jacques Balmat)의 동상이다. 발마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몽블랑이 있다. 다른 하나는 후에 세워진 의사 미셀 파카드(Michel Paccard)의 동상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슬픈 이야기 있다. 부유한 과학자 소쉬르는 자신이 몽블랑에 직접 등정을 할 수 없어. 거대한 상금을 건다. 여러 사람들이 등정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그러다가 1786년 발마와 파카드가 등정에 성공한다. 그런데 상금과 명예욕에 눈이 먼 발마가 자기 혼자 등정했다고 소문을 낸다. 그러나 100년 후에 영국인 산악인 프레스필드가 집요하게 추적하여 결국 두 사람이 등정했다는 진실이 밝혀졌고, 파카드의 동상도 세워지게 되었다.
선한 사람들만 살 것 같은 산속에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을 불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인위적인 문화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선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서양 철학에서는 홉스(Thomas Hobbes)와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대표적으로 상반된 주장을 편다. 홉스는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말한다. 시민 사회에서 벗어난 자연적인 삶은 정념들이 충돌하는 무대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욕구하는 것들이 충분히 주어져 있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이웃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니 나의 이웃을 의심하고 불신할 수밖에 없다. 불신 상태에서는 방어적인 전략만으로는 자기 몸을 지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폭력과 간계를 사용하여 먼저 공격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또 일부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함으로써 쾌락을 느끼고, 자신의 권력을 목적 자체로 향유하려는 지배자가 되려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자연 상태 속에서도 인간은 모두 자신에 대한 평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이런 허영과 명예를 추구하려는 욕구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로 몰고 간다. 우리 인간 본성은 본디 악하다. 이런 본성 중에는 경쟁, 불신, 명예가 들어있다. 경쟁은 침략하도록 만들며, 불신은 안전을 위하여, 명예는 평판을 위하여 침략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분쟁과 침략, 전쟁은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에서 피할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정념에 기초하여 행동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것들을 선과 악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선과 악에 대한 공통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투쟁과 전쟁 상태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홉스가 그리는 자연 상태는 우울하다.
이에 반해 루소는 자연 상태는 선이라고 주장한다. 원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 간의 교류도 없이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미개인이었기 때문에 일도 언어도 집도 전쟁도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동료 인간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고 반대로 해칠 욕구도 없었다. 그의 욕망은 자신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았다. 먹을 것, 여자, 그리고 휴식은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경험하는 행복이었다. 반면 고통, 배고픔은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불행이었다. 허영심도 배려도 존중도 경멸도 몰랐고 소유와 정의에 대한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보존(Amour de soi-même; 자기애)을 위협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주 위험한 다툼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그런 자연인에게는 단지 자연적 충동과 감정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개념으로 설명하기 이전의 한 순수한 인간이 가지는 감정이었다. 순수한 인간이 가진 그 선천적인 감정이 바로 동정심이다. 어떤 맹수가 한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어 치명적인 이빨로 아이의 연약한 사지를 으스러뜨리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찢는 것을 목격한다면, 개인적인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 사건의 목격자의 마음은 너무나 끔찍한 동요를 느낀다. 이런 루소의 예는 맹자가 사단(四端) 중 인(仁)의 단서가 되는 측은지심을 설명할 때 드는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 아이’의 예와 너무나 흡사하다. 루소는 관대나 관용이나 인간애 같은 것들이 약자와 죄인, 혹은 인간 일반에 기울이는 동정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친절뿐만 아니라 우정까지도 특정한 대상에 쏟는 변함없는 동정심의 결과이다. 이렇게 동정심은 자신의 동료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선천적인 혐오감에서 발생하여, 우리를 고통 받는 자의 입장에 서보게 하는 자연적인 감정이다. 이렇게 소박한 ‘자기보존의 욕구’와 타인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을 가진 자연 상태의 선한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사회가 만들어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타락해졌다. 문명 속에서 자유 재산이 생기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등장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서 먹을 것을 구하거나 아니면 약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각자의 성격에 따라 지배와 예속, 폭력과 약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야 된다는 논리 자체는, 도리어 보다 더 강한 힘에 의해 빼앗기는 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부자는 항상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부자는 마침내 필요에 의해 다급해져 이제까지 인간의 정신 속에 들어온 적이 없는 가장 신중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외부의 적을 핑계로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 같이 복종해야 하는 소유에 대한 정의와 평화에 관한 규칙을 제정했다. 이 사회의 법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하여 자연적 자유를 파괴해버렸고, 소유와 불평등의 법칙을 영구히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교활한 횡령을 확정적 권리로 만들어 몇몇 야심가를 위해 인류 전체를 노동의 굴레에 예속시켰다. 이렇게 한때 소박한 자기 보존의 욕구와 순수한 동정심을 가졌던 인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빼앗기고 오히려 복종이 명예로운 것으로 치장되어, 이제 타인의 평판 속에서만 그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비참한(misérable)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사람은 직업을 못 속인다. 강단에 오래 있었더니 이제 퇴임하고 여행 와서도 50분 강의를 하려고 한다. 그것도 나무위키에 난 내용을 그대로 표절하면서. 제발 정신 차려라. 효범아. 내일이면 트레킹이 끝나고, 우리는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그만 쓰고 이제 기도하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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