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표준사회과학모델
진화심리학과 대비해서, 인간을 보는 전통적인 사회적 관점을 표준사회과학모델(SSSM: The Standard Social Science Model)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 모델은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인간만은 생물학의 원칙과 이론으로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유일한 종족이다.
2) 인간의 해부학적 특징은 진화를 거쳐 형성되었지만, 인간의 행동과 인식에는 생물학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3) 모든 종은 타고난 본성이 있지만, 인간의 본성은 빈 서판(백지, tabula rasa, a blank state)이다. 영국의 경험론의 철학자 존 로크는 이 점을 『인간오성론』에서 천명했다. “ 이제 마음이 가령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어떻게 채워지는가? 그 종이는 어떻게 인간의 분주하고 무한한 공상에 의해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게 그려지는 광대한 내용을 획득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는 것이다.”
4) 인간의 행동은 거의 전적으로 환경과 사회화의 산물이다. 인간은 사회화 때문에 인간답게 산다. 이것이 환경결정론(environmentalism)이다.
진화심리학은 이런 표준사회과학모델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1) 사람은 동물이다. 인간이라고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분명히 독특하지만 독특하다는 것 자체는 독특한 게 아니다. 모든 종은 독특하며 각자가 처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독특함을 진화시켜왔다.
2) 인간의 두뇌 역시 인간이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자손을 번식하도록 적응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쪽으로 형태를 갖춰 진화해왔다.
3) 사람은 사람의 본성을 타고난다. 인간은 생래적인 문화적 학습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 본성의 ‘서판’은 한 번도 비어 있었던 적이 없으며, 우리는 이제야 그것을 읽는 중이다. 표준사회과학모델이 가정하는 일반-목적적이고(general-purpose), 내용-독립적인(content-independent) 심리 구조를 통해서는 인간이 마음이 일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동등 잠재력을 가진 영역-일반적 심리 구조를 가지고는 언어를 말하고 이해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읽는 능력, 동료를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능력과 같은 많은 표준적인 심리적 능력들의 습득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역-일반적 체계는 조합 폭발(combinatorial explosion) 또는 프레임 문제(frame problem)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처리 규칙이 부족한 영역-일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을 경우, 주어진 상황이 제공하는 정보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우며,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 역시 무한하다. 영역-일반적인 정보처리 체계로는 이 무한대의 정보와 대안을 처리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무한한 정보와 대안들 가운데서 일부만을 취하게 되는 경우에는 영역-일반적 체계는 그와 같은 제한된 입력만으로는 인간의 일상적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다. 투입되는 자극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적은 정보의 입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표준적 심리 능력들을 습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은 정보에 전문적으로 반응하는 생득적인 심리적 메커니즘 즉 특수 목적의 영역-특수적 프로그램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체의 학습과 문제 해결은 물론 가장 단순한 일상적 과제조차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이 ‘소수의, 단순한, 영역-일반적이고, 내용-독립적이며, 일반-목적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구성된 빈 서판이 아니라, ‘다수의, 복잡하고, 영역-특수적이고, 내용-의존적이며, 전문화된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구성되어 있는 진화적 적응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4) 인간 행동은 타고난 인간 본성과 환경이 낳은 산물이다. “인간 본성은 유전되는 마음 발달상의 규칙적인 속성들로서 우리 종에 공통된 것을 가리킨다. 그 속성들은 ‘후성 규칙(epigenetic rule)’으로서, 머나먼 선사 시대에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 규칙들은 우리의 감각 기관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우리가 기호 체계로 세계를 표상하는 방식, 자동적으로 스스로에게 열어 두는 대안들, 가장 쉽고 가장 많은 보상을 얻는 반응 등에서 드러나는 유전적 편향을 말한다.”
후성 규칙이 빚어내는 행동들은 반사처럼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행동들은 학습되지만, 이 학습 과정은 ‘준비된 학습’이다. 이 학습 과정은 배우는 성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대안을 저 대안보다 강화하는 성향을 타고 났다.
유전자의 진화와 문화의 진화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한다. 최근 수천 년 동안 일어나고 있는 공진화의 사례는 성인의 젖당 내성 발달이다. 이전의 모든 인류 세대들에서 젖당을 소화할 수 있는 당으로 전화시키는 효소인 락타아제는 유아에게서만 생산되었다. 아이가 젖을 떼면 몸은 자동적으로 락타아제 생산을 중단한다. 그러다가 9000~3000년 전에 북유럽과 동아프리카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목축이 발달했을 때, 유유를 계속 마실 수 있도록 어른이 되어도 락타아제를 계속 생산하게 만드는 돌연변이가 문화적으로 퍼졌다. 우유와 유제품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은 생존과 번식 면에서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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