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의식의 구조
윌버는 단일 구조로서의 인간 의식을 거부하고, 의식은 빛의 스펙트럼처럼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져 한 대역에서 다른 대역으로 변화, 발달,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20년대 청년기에 출판된 최초 저서 『의식의 스펙트럼(Spectrum of Consciousness)』에서 윌버는 동양의 정신적 전통과 서양심리학을 보다 포괄적인 틀에서 통합시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의식을 크게 그림자(shadow) 영역, 자아(ego) 영역, 생물사회적(biosocial) 영역, 실존(existential) 영역, 자아초월(transpersonal) 영역의 다섯 대역으로 구분하였다.
이런 식의 초기 구분은 이후 윌버 사상 1기에서 5기로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더욱 체계화되고 정교해지면서 의식의 구조는 전개인적 단계(prepersonal stage), 개인적 단계(personal stage), 초개인적 단계(transpersonal stage)로 크게 구분되고, 이는 다시 9-10개 단계로 세분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발달은 구조 속의 단계를 밟아 올라간다고 할 수 있지만, 각 단계는 파동처럼 서로 간섭하기 때문에 정확히 그 단계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인간 발달은 어느 한 측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약 20여개의 발달 지류가 존재하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인지, 도덕성, 세계관, 정서, 성, 욕구 등인데, 각 발달의 지류가 인간 의식의 파동과 같은 흐름을 타고 각 단계를 밟아 올라간다. “이렇게 다양한 발달의 지류 중 어느 하나만이 우월하거나 지배적이지는 않다. 물론 인지라는 발달지류 혹은 라인이 다른 라인의 발달에 필요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만 피아제의 주장처럼 인간의 발달이 곧 인지발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총체적 발달은 모든 발달 지류가 놓인 단계의 총합이기 때문에 비선형적이며, 때로는 뒤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복잡의 나선의 형태를 그린다.”
이런 윌버의 의식구조론의 기본토대는 그의 사상 3기를 대표하는 저서 『의식의 변용(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 )』에서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에서 윌버는 심리학의 핵심주제인 ‘자기(self)’를 자신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즉 자기(특히 근접자기)는 의식의 사다리를 직접 오르는 자이다. 또 자기는 의식의 구체적 특징과 능력을 지니는 담지자이며, 거대한 생명의 파동을 타고 가는 항해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식의 주체인 자기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일정한 특징을 드러내면서 변화, 발전하는 과정 중심의 시스템이 된다. 그래서 ‘자기’는 더 정확히는 ‘자기체계(self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윌버에 따르면 이 ‘자기체계’는 (1) 스스로를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정체성의 중심 (2) 마음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조직화의 중심 (3)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선택의 중심 (4) 내부 혹은 외부의 위협적인 대상에 대한 방어의 중심 (5) 다양한 경험들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대사기능 (6) 발달의 어느 한 단계에 머물거나 다음 단계로 항해하는 선택의 중심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발달과정으로서의 자기(자기체계)를 강조하는 윌버는 개성을 지닌 자기의 출현 여부에 따라 그 구조를 세분화하여 3 단계씩 세 부류 즉 9단계 혹은 10단계로 나누고 있다.
전개인적(prepersonal) 수준(단계)
(1) 감각신체적(sensoriphysical) 단계: 감각 및 지각이 운동과 단순하게 연결되는 단계로 보통 생애 첫 2년에 일어나며 물리적 대상을 지각하는 능력으로 이끈다.
(2) 환상적-정서적(phantasmic-emotional) 혹은 정서적-성적 단계: 정서와 성이 발달의 주요 과제로 출현하면서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단계이다.
(3) 표상적 마음(representational mind) 단계: 상징과 개념이 출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지적 조작이 가능해지는 단계로, 피아제의 전조작적(pre-operational)사고의 단계에 해당된다.
2. 개인적(personal) 수준(단계)
(4) 규칙/역할 마음(rule/role mind) 단계: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여 타인의 역할을 취할 수 있는 단계로, 피아제의 구체조작적(concrete operational) 사고의 단계에 해당된다. 구체적 조작은 도식과 규칙으로 수행하는데, 이는 또한 이 시기에 처한 자기가 사회의 다양한 역할을 취하여 자아 중심/전인습 단계에서 사회중심/인습영역으로 이행하도록 허용한다.
(5) 형식적-반성적 마음(formal-reflexive mind) 단계: 자신의 사유를 객관화시킬 수 있으며 가설 설정, 추론이 가능한 단계로 피아제의 형식조작적(formal operational) 사고의 단계에 해당된다. 형식적 조작 의식은 여러 면에서 구체적 사고라는 민족중심/사회 중심적 세계를 탈피하여 세상에 대한 후인습적 정위를 뒷받침하기 시작한다.
(6) 비전-논리(vision-logic) 단계: 개념, 상징, 이미지들의 네트워크적 연결고리를 파악할 수 있는 개인 영역의 가장 통합된 구조의 단계이다. 의식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형식주의를 넘어 성장하면서 먼저 역동적 상대성과 다원주의의 인지로 이행하며, 그 후에 단일성, 전체성, 역동적 변증법주의 또는 보편적인 통합주의로 나아간다.
3. 초개인적(transpersonal) 수준(단계)
(7) 심령적(psychic) 단계: 인지적, 지각적, 역량이 편협한 개인적인 조망이나 관점을 넘어서는 단계로 비전 논리의 완성이자 비전적 통찰의 단계이다. 심령단계에서 자기는 경험적 에고를 벗어나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개인적 에고를 관찰하는 자기를 통찰할 때 혼(soul)이 싹트기 시작한다. 에고를 넘어선 혼은 “어떤 개인, 문화, 전통에 속박되어 있지 않지만 모든 사람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에게 떠오르는 ---우리 안에 내재한 빛”으로 드러난다. 이를 종종 상위-혼(Over-Soul) 혹은 세계혼이라고도 하며 윌버는 자연신비주의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즉 심령단계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자연신비주의(nature mysticism) 경험이 주가 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8) 정묘(subtle) 단계: 초월적 통찰과 몰입 속에서 원형, 플라톤적인 형상, 정묘한 소리나 빛을 만나게 되는 단계로, 윌버는 정묘단계를 가장 잘 묘사한 예로 성 테레사의 『내면의 성(Interior Castle)』을 들고 있다. 여기에서 혼 전체는 신과 합일을 이루고. 자연의 근원으로서의 신 또는 영을 만나게 된다. “이제 가장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사랑과 기쁨의 중심에서 탄생한 모든 존재들을 포용”하게 된다. 정묘단계는 神性신비주의(deity mysticism)를 만들어낸다.
(9) 시원(원인, causal) 단계: 모든 하위구조의 비현시적 원천 혹은 초월적 바탕과 만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의식은 신성(Godhead)이라는 원초적 정체성을 취하며 이 때 신과 혼 모두가 초월된다. 이것은 형상 없는 영으로서의 “현시된 만물의 목표이자 정점이며 근원”이다. 이를 심연, 형상 없음, 비어 있음, 무, 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시원단계는 무형상이나 비어 있음, 공을 경함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무형신비주의(formless mysticism)를 만들어낸다. 정묘단계까지는 신이 여전히 대상으로서 체험되는 반면, 원인단계에서는 신-나라는 이분적 분열이 해소되고 신과 내가 하나로 녹아든다. 그러나 공 체험은 의식발달의 최종 단계가 아니다. 여기에는 여전히 형상-무형상의 이원적 분열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분열은 여전히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즉 무형의 공과 드러난 형상이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본성의 서로 다른 측면임을 통찰하여, 색과 공이 둘이 아님으로 통합되는 비이원의 세계로의 발달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0) 비이원적(nondual) 단계: 무형의 공이 현시된 형상의 세계와 하나로 통합되는 단계로, 이 단계는 주체와 객체, 내부와 외부,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간의 분열이 극복되고 항존하는 ‘순수한 현존(pure Presence)’으로서의 ‘이것’만이 존재한다. 존재 자체는 모든 형상과 경험을 초월한 텅 비어있는 자각으로서 이것을 통해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 그 순수하고 텅 빈 자각 속에서 나-너는 모든 세계의 생성이며 소멸이다. 중단 없이 그리고 영원히.” 이는 모든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온갖 현시된 세계로 드러나는 물리적, 심리적 현상으로부터 탈중심화된 절대자유의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이원의 단계는 현시된 만물과 그 근원이 동일함을 통찰하는, 비이원신비주의(nondual mysticism)를 만들어내는 단계이다.
4단계부터 6단계까지가 개인적 수준이다. 개인적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 다음 발달과정에서 두 개의 다른 방향, 즉 신체와 정서로 퇴행할 수도 있고 진정한 나를 향해 진보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퇴행할 경우 좀 더 원시적인 측면에 접하게 되고, 진보해갈 경우 신성한 본성과 만나게 된다.
초개인적 수준 즉 7-10단계는 신 중심적 정체성의 단계들이다. 이 단계에 오면 의식은 개인의식의 최고점인 비전-논리 단계 이상으로 성장하면서 자아중심적인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개인적 조망이나 관점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즉 합리적 이성과 사고 기능은 의식에서 그 주도적 지배력을 상실하는 반면, 내적인 비전과 영감이 전면에 출현하면서 스스로의 사고체계를 한걸음 물러서서 관찰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진다. 마음의 한계로부터 해방된 의식은 무경계의 마음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되는 발달의 수준 혹은 단계는 대부분의 인간 발달이 그렇듯 세월이 흘러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런 경험 자료들을 소화, 동화하고 새로운 환경자극에 적응하는 가운데 서서히 진행된다. 그러나 윌버는 자각을 통하여 그 발달의 속도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자기체계는 자각을 통하여 발달의 어느 단계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항해하며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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