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93, 언제나 그곳에 가면 길을 잃는다)

이효범 2022. 1. 8. 07:21

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93, 언제나 그곳에 가면 길을 잃는다)

 

o 언제나 그곳에 가면 길을 잃는다

 

구녕 이효범

 

언제나 그곳에 가면 길을 잃는다.

마음이 먼저 젖어 안개가 자욱한 곳

눈을 감아야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곳

길은 바람처럼 굽어있고 멀리 강이 흐르는 곳

지구를 칭칭 동여매도록 길게 이어지던 우리들의 말

작은 들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주면

너는 고운 음이 나는 악기로 변하던 그곳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서 곧잘 차라투스트라 교인이 되던 곳

세상의 선악을 피해 여린 영혼이 안식하던 우리들의 모태

너와 나 사이에 허무가 경계하지 않던 그곳

시간이 시간을 내어주지 않아

지상의 삶이 꽃처럼 피어나던 정원

그러나 집을 떠나야 집을 볼 수 있고

사랑을 떠나야 사랑을 알 수 있는 존재의 신비

나는 여기에 남고 너는 강 너머에 있다.

애절한 기도만이 온 몸을 흔드는 그곳

언제나 그곳에 가면 길을 잃는다.

 

후기:

한용운 스님에게 백담사가 그러하듯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의미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나 평생 다닌 직장, 아니면 신의 음성을 들은 산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카페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모든 추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잔잔한 미소를 짓거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비밀스럽게 평생 동안 내 속에 간직하고 싶은 나의 동굴을 용기를 내어 20년 만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니 큰 길도 새로 나고 주변이 너무 변해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사실 나는 여기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시간과 사람과 사건은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그럴까요? 나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