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6, 미끄러운 경사면, 훈제청어의 오류)

이효범 2021. 9. 11. 08:09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6, 미끄러운 경사면, 훈제청어의 오류)

 

구녕 이효범

 

3-7.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의 오류(slippery slope)

 

충분한 근거 없이, 한 제안을 받아들이면 연쇄논법에 의해 부조리한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그 제안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논변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A1이 성립하면 A2가 성립한다. A2가 성립하면 A3가 성립한다. ---An이 성립하면 An+1이 성립한다. An+1은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A1은 옳지 않다.

이 논변에서 연쇄추리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면 이 논변은 좋은 논변이지만, 그런 이유가 없다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한 가지 예를 살펴보자.

 

직원들이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쉴 수 있는 휴게실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거부되어야 한다. 만일 직원들에게 휴게실을 마련해 주면, 그들은 건강관리를 위해 헬스 센터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고, 이것을 들어주면, 결국 수영장과 콘도 이용권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이 회사는 도산하고 말 것이다.”

 

직원들에게 휴게실을 마련해주면 그들이 헬스 센터, 수영장, 콘도 이용권 등을 요구할 것이라고 볼 충분한 이유가 없다면 이 논변은 미끄러운 경사변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생명 윤리에서 이 논증이 사용되기도 한다. 배아복제, 태아복제, 개체복제 등은 하나의 연속선을 그린다. 배아복제가 허용될 경우, 비록 논리적 필연은 아니지만 적어도 실천적으로는 개체복제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어떤 규칙에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그 예외 조항이 오용되거나 남용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때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이 논증이다. 예를 들어 만일 임신중절(낙태)이 허용된다면 태아 살해는 물론 심지어 유아 살해까지도 용납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중증장애자를 포함한 성인의 안락사, 뇌사자로부터의 장기 적출 등도 허용되거나 오용, 남용될 소지가 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근거로 하여 아예 임신중절에 반대하기도 한다.

 

3-8. 훈제 청어의 오류(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오류, red herring fallacy)

 

경찰의 개가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도망자가 미끼로 사용하는 것이 훈제 청어이다. 그래서 주의나 관심 또는 주제나 논점을 딴 데로 돌리는 오류를 훈제청어의 오류라고 한다. 이 오류는 논증에서 이기기 위해, 원래의 논증과 관계가 없거나 부차적인 주제를 끌어들여 주된 주제에서 주의를 흩뜨릴 때 발생한다. 이런 경우 오류의 귀추는 다음과 같다.

 

주제 A가 논의되고 있다.

주제 B가 마치 주제 A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도입되지만 실제로는 관련이 없다.

주제 A가 포기된다.

 

예를 들어 여러 종류의 차들을 놓고 그 안정성을 비교하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불리한 논쟁자가 슬쩍 논의를, 외국에서 수입한 차와 국내에서 생산한 차들이 어떤 것인지 하는 주제로 돌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논의의 주제가 어떻게 전환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이슈를 논하게 된다. 이 때 이 논쟁자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오류를 사용하여 불공정하게 논쟁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