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4)

이효범 2021. 8. 16. 06:23

o 다들 건강하시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코로나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고 위안했지만, 갈수록 위안은커녕 위기만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불안의 시대에 한가롭게 학술적으로 선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부처님의 독화살 비유가 생각납니다. 독화살을 맞았으면 우선 화살을 뽑고 몸으로 퍼지는 독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독화살을 누가 쏘았으며, 독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화살은 어떤 방향에서, 얼마만한 빠르기로 날아왔는지를 한가롭고 장황하게 연구하는 것이 환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종교가 아닌 철학의 운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철학은 아픈 사람을 금방 낫게 해주는 실용적인 처방전을 내주지는 못하지만, 그런 처방전을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토대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런 토대 중의 한 주제를 여름의 더위와 싸움하며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편지로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일단락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보내드린 14편의 편지는 선에 대한 저의 초고입니다. 많은 부분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인용인데, 시간에 쫓겨 다 밝히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더 다듬겠습니다. 한 주제를 정리하고 하니, 문득 이마가 서늘하고, 밖에서는 코스모스가 한창 피기 시작했네요. 이번 가을은 환란 속에서도 좋은 일들이 끊어지지 않기를 빕니다.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4)

 

o 선에 대하여(14)

 

구녕 이효범

 

현대 서양 대륙의 윤리학자로는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이 있다. 그는 존재론의 철학자이지만,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실질적 가치윤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셸러는 칸트가 도덕의 타율적 상대성을 반대하고 자율적 절대성을 밝힌 것은 좋았으나, 가치 사물(가치의 부담자)과 가치 본질을 동일시 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모든 가치는 사물들 속에 체현되는 것이지 사물들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색채를 띠고 있는 물건이나 또는 사람과 관계없이 색채만을 생각할 수 있듯이, 가치도 그 가치를 짊어지고 있는 자에 관계없이 가치 자체를 생각할 수 있다. 가치는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가치물로부터의 추상이 아니며 그것과는 독립하여 선천적으로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다. 가치는 자연적 존재인 재물(財物)도 아니고 심리적인 작용도 아니다. 가치는 그 자체 내에 뿌리박고 있으며, 단순히 자체의 내용에 의해서 스스로를 입증하는 독자적인 성질이다. 이런 가치는 정서적 직관(직접적 통찰력) 즉 감정 내지 순수한 정서의 지향작용에 의해 파악된다. 가치는 우리의 지향적 감정 작용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다. 셸러는 심정(heart)은 정신이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파스칼의 금언을 윤리체계의 응용한다. 심정(정서)은 지성이 논리를 이해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 자신의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 그 영역에서 심정은 지성이 논리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가치를 깨닫는다. 이런 셸러의 입장을 이어받아서 하르트만은 윤리학(Ethik)에서 방대한 가치 체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영미의 분석윤리학자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기반 위에서 선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하르트만은 서구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가치들을 설명하고 그 가치들 간의 관계를 법칙으로 정리한다. 그는 도덕적 근본 가치로 선, (,고결), 원만, 순결 4가지를 꼽는다. 모든 도덕적 가치의 근저에는 이런 근본 가치가 놓여 있으며, 선이 이 가치들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근본가치의 특징은 매우 상이한 많은 종류의 행위에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1군의 도덕적 특수 가치가 있는데, 정의, 지혜, 용기, 절제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론한 모든 덕들이 그것이다. 이런 덕들은 고대 도덕의 중요한 가치들이다. 다음으로 제2군의 특수한 도덕적 가치들이 있다. 근인애(近人愛), 성실과 정직, 믿음성과 성실성, 신임과 신뢰, 근신, 겸손, 거리(距離), 사교의 가치들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 문화권의 주요한 가치들이다. 다음으로 제3군의 도덕적 특수 가치가 있다. 원인애(遠人愛), 증여의 덕, 인격, 인격애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근대에 받아들여진 가치들이다.

 

선은 모든 가치들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기존의 윤리설들이 선을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엇으로 다루지만, 사실 선은 직접으로나 간접적으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기존의 윤리학은 선을 특수한 가치로 생각하여, 이것만을 유일무이한 최고의 가치라고 고집하며, 선을 쾌락이니, 행복이니, 전체성이니, 정의니, 사랑 등등으로 보았는데, 최고 가치가 이렇게 많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이 어느 것 하나도 선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또 플라톤처럼 이런 선의 다양한 내용들에 대해 선의 이데아를 내세워, 이것을 덕들의 위에 두는 것은 도리어 선의 내용을 정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이데아는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이프니츠처럼 선을 완전성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이것은 선의 풍부한 내용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선의 정의로는 실패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선은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하르트만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선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다 정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기껏해야 가치의 질료만 알 수 있을 뿐이고, 특수한 가치의 성격 그 자체는 오직 살아있는 사람의 가치 감정에서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치 감정은 특수한 내용에 대하여 특수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질료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가치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간접적 규정도 할 수 없다. 선의 질료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의 단순한 가치 요소가 결합하여 선의 가치 내용에 참가한다는 것만으로 선의 본질이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선을 여러 가지 가치 요소의 결합으로만 보면, 선이 지닌 도덕적 성격이 완전히 무시되기 때문이다. 선은 그 모든 구성요소의 복합 이외에 어떤 새로움을 가지고 있다. 선의 선다움은 바로 이 새로움에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시할 수는 없다. 선의 가치적 성격이 가치 감정에 솔직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선의 본질은 실질적으로 매우 복잡하다. 선의 부분적인 비합리성은 이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정의할 수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 부정적으로 한정해서 선의 윤곽을 그려볼 수는 있다. 선의 다의성(多義性)으로 인해서 수많은 오해가 있어 왔다. 우선 선은 그 무엇에 좋은 것이라는 수단적 가치가 아니다. 공리주의는 이 점에서 오류이다. 또 선은 그 누구를 위해서 좋은 것도 아니며, 가치물 중의 단지 하나의 가치물도 아니며, 최고의 가치물이나 모든 가치물의 합계도 아니다. 행복주의는 이점에서 잘못이다. 선을 최고선으로 이해하면 도덕적 가치가 가치물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은 물론, 도덕적 가치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왜곡된다. 최고선은 비교적인 것이지만, 도덕적인 선은 그 무엇보다 높은 최고의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상적(理想的)인 극한까지 올라갈 능력을 가진 어떤 것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이 선다운 점은 정도나 강도나 또는 완전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본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선을 생명의 가치와 대조시킨디. 그러나 이것은 선을 아주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 위에는 의식, 활동, 고뇌, (능력), 자유 등의 가치계열이 있다. 선은 이 계열 위에 위치하고, 이 계열의 최고 가치와 선 사이에는 원리적인 이질성이 있다. 가치의 계열이 가치의 질료로서, 인간에게 어느 정도 실현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은 선악의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선과 악을 행할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선이나 악이라고 할 수 없고, 선악의 바로 앞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인격적 존재자, 도덕적 존재자)은 의식이나 자유 등과 같은 작용 가치들을 도덕적 비가치로 전환시킬 수 있다.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 자는 악을 행할 위험성도 동시에 갖는다. 이 위험성은 도덕적 존재자의 근본 본질에 속한다.

 

작용 가치의 정점은 목적 활동이다. 목적 활동은 자기 속에 낮은 가치들을 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다. 목적활동은 인간발전의 최정상이고 가치의 총화이다. 그런데도 목적활동은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충분한 가치 내용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직 중요한 것이 결여되었다. 즉 그것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 목적 활동이라는 본성에서는 활동의 방향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별개의 규정을 필요로 한다. 목적활동 자체는 그 내용의 가치론적 높이와는 무관하다. 즉 목표로 되는 것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선은 사실적 세계에 있어서의 가치의 목적활동이다. 목적활동 능력이 있는 자의 가치에 대한 태도만이 선이나 악이 된다. 이 세상에 선이나 악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악이 존립하는 까닭은 악이라는 비가치가 관념적으로 존재한다든지, 또는 이 세상에 악이 실재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악을 실현하려고 지향(志向)하는 실재적인 힘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추상적으로 말하면 지향된 사태 가치 속에, 또한 지향의 범주적 형식 속에, 선악의 본질이 질료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태 가치에 대한 지향의 관계에 있어서만 선악의 본질이 있다.

 

목적활동 그 자체는 최고차의 도덕적 능력이지만 동시에 최고차의 부도덕한 능력이기도 하다. 선의 가능성은 같은 정도로 악의 가능성이다. 최고의 능력은 동시에 최고의 위험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 위험선상에 놓여 있다. 위험 그것이 사람의 도덕성의 기초이다. 이 기초 때문에 사람은 도덕적 존재가 된다. 인간에게는 목적을 세우는 능력이 주어져 있고, 이 능력이 축복이 될 수가 있고 저주가 될 수가 있다. 사람은 악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악으로 떨어질 능력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선의 능력은 불가능하다.

 

선은 활동, , 자유, 목적활동 같은 작용으로서의 작용에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작용이 일정한 성질을 가지는 한에서 부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질은 가치지향에 있다. 선과 모든 도덕적 가치는 작용의 지향가치이다. 그런데 문제되는 지향의 성질은 지향된 가치에 부착한다. 그렇지만 선이 지향된 가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향된 가치는 어디까지나 사태가치이다. 선은 지향에서 지향된 것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역으로 지향된 것의 사태는 선의 지향가치를 제약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향된 것의 가치가 도덕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향될 수 있는 가치는 여러 가지다. 그러므로 선의 의미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선 각 가치계열의 내부에서 반가치로 향함은 악이고, 가치로 향함은 선이다. 인간은 본래 반가치를 위해 반가치를 의욕하는 자가 아니므로, 가치의 종류가 많아 갈등이 생기는 일이 없다면, 선악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쪽 가치를 취하면 다른 가치를 잃게 된다. 물질적 가치에서 어떤 사람이 그것을 누린다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갖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재화의 소유를 지향함은 그 자체로서는 선이지만, 타인의 소유를 제외시키는 것이 포함되는 한에서는 악이다. 그러므로 이해가 충돌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부단히 선악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인간에 있어서 구체적인 생활 상황은 수많은 가치가 동시에 관여된다. 인간의 지향은 이들 가치 전부로 향할 수 없다. 그 중의 하나 또는 몇 개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럴 적에 선은 비교적 높은 가치 쪽으로의 향함이고 악은 비교적 낮은 가치 쪽으로의 향함이다. 선의 의미는 낮은 가치를 부정함이 아니라,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작용의 지향가치로서의 선은 내용적으로는 보다 높은 가치의 선호에 있고, 악은 보다 낮은 가치의 선호에 있다. 그럴 적에 보다 낮은 가치도 느껴지고 인정되는데, 그것은 선의 본질에 속한다. 예를 들어 정직한 사람은 타인의 사유재산이 가치물인 것을 알고 이것을 존중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진정한 정직이 성립되고, 오직 그래야만 정직이 보다 높은 가치의 현실적인 우선감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정직은 보다 낮은 가치인 자연적 욕구나 관심을 억제할 때 그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선은 보다 높은 가치를 선택하는 목적활동이다. 여기서 보다 높은 가치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이론적 판단의 형식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감정이 무반성적으로 직접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이 있다는 사실은, 가치감정이 비단 질료와 그 가치성질에 대한 의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치의 고저(高低)에 대한 방향의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선은 각각의 상황에 있는 다양한 가치들의 범위 내에서 행해지는, 가치의 고저원리에 따른 가치의 선택이다. 이 선택은 사색의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것이다.

 

모든 작용가치와 선의 차이점은, 선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고나면서 악이란 말은 아니다. 환경의 산물인 인간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인간은 갈등 속에서 결단할 적에 비로소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각각의 사람은 도덕적 존재의 건설자이다. 그러므로 전 도덕생활을 가치의 등급에 따라 질서를 세우는 것이 선의 객관적 이상이다. 선이 모든 인간에 대하여 일종의 도덕적 근본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은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다. 즉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호협한 영웅과 도덕적 위인이 되기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선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선은 최소한에 지나지 않는 가치내용을 가진 것이지만, 그러므로 그 요구의 타당성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범위를 갖는다. 특수한 모든 가치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도덕적 가치는 어느 것이나 선 이상의 그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