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1, 부하라의 프라타나스)

이효범 2020. 2. 3. 22:07

o 부하라*의 프라타나스

 

또박 이효범

 

푸른 잎을 가진 프라타나스여,

너는 아는가,

죽음 이후를.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늙은 대상은

실크 로드를 따라 여기 이슬람의 성지로 왔으리라.

태양을 가린 프라타나스 그늘에 앉아 거친 호흡을 쉬고

이 길에서 가장 높은 등대 옆 크고 오래된 모스크에 들어가

사막 너머 가족의 안녕을 기도했으리라.

 

넓은 잎을 가진 프라타나스여,

너는 높게 자랐다.

또 대상처럼 오래 살았다.

 

대상은 머리를 오래 바닥에 박고

간절하게 신에게 기도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신을 보지 못했으리라,

이슬람 모스크 신전 밑에 묻힌

조로아스터교 신전을 보지 못한 것처럼.

 

늙은 대상에게 짙은 그늘을 내놓은 프라타나스여.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도 시간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이 흘러도 우리가 생명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너는 멀지 않아 작열하는 태양 아래 쓰러지리라.

그러나 하루하루를 노래한 너의 숨결은 바람에 날리지 않고

지상에 남아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리라.

노인의 아들도 머지않아 큰 대상이 되리라.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비단을 가득 싣고 여기 화려한 도시에 와서

오아시스 샘물에 몸을 정갈히 씻고 신전에 들어가리라.

아마도 기도하기 전에

곱게 뻗은 프라타나스 신전 기둥을 어르만지리라.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도 신을 보지 못한다.

신은 신의 길을 가고

대상은 대상의 길을 가고

프라타나스는 프라타나스의 길을 간다.

 

* 부하라(Bukhara)는 우즈베키스탄의 2,500년 된 도시로 중앙아시아의 최대 이슬람 성지이다. 도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o 후기: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왔습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 민족의 땅(나라)입니다. 여기는 옛날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었던 지역이어서,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등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들은 모두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곳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와 왕래가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인연이 있었습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고분 벽화에는 고구려인인지 신라인인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깃털 꽂은 모자에 칼을 찬 우리의 사신의 모습이 분명히 그려져 있습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90%는 대우자동차의 것입니다. 그리고 수만의 우즈베키스탄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10만 명의 우리 동포들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일본의 간첩이라고 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강제로 이주 시킨, 브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극동에 살고 있던 고려인 후손들입니다.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외곽의 고려인 마을에는 농업 영웅인 김병화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지만, 그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와 추운 겨울에 늪지대에 버려진 이야기를 들으면, 조국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조국이 힘이 없으면 그 백성들은 얼마나 서럽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인 후손들은 악착같이 목숨을 걸고 일했고, 자신은 먹지 못하면서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고려인들이 유대인 다음으로 진학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고려인 남자들은 우즈베키스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가정적이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듬직한 모습이 최적의 남편감이라는 겁니다.

고려인 3세대, 4세대는 우리말을 모두 잊었습니다. 소련연방이 무너지면서 일부 고려인들은 가난한 이곳을 떠나 러시아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다시 우즈베키스탄의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가 잘 살면서 그들은 이제 한국 언어가 필요해졌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대부분의 대학에는 한국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인기도 높습니다. 이런 와중에 고려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즈베키스탄의 본류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한민국에서 동등한 국민의 한 구성원으로 대우해주지도 않고. 이런 문제는 비단 이곳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 세계에 퍼져있는 재외동포들의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명목적으로는 ‘CIS 고려인 문화와 한국문화라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지만, 실은 중앙아시아 여행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마르칸트가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내겐 부하라(Bukhara)’라는 도시도 참 인상 깊었습니다. 종교도시인 이곳은 2500년 된 고대도시로서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원이라는 뜻을 가진 부하라는 과거 전성기에는 300여개의 모스크와 167개의 이슬람 신학교가 있었던, 이슬람의 중요한 성지 중의 하나입니다. 또 부하라는 서역과 중국을 잇는 실크로드의 주요 오아시스였기 때문에 인도의 모직과 중국의 비단이 이곳 시장에서 활발하게 교환되었고 아직도 그 행상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경제와 종교라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 사실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지역에도 공주가 성할 때는 계룡산 서쪽에 있는 갑사가 흥하다가, 대전이 커지니까 계룡산 동쪽에 있는 동학사가 번창하는 것과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부하라는 오늘날로 치면 뉴욕이나 서울이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 영광을 지닌 신비한 고대 도시에서 여행자가 되어 하루 밤을 묵게 되면 갖가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여름날의 구름처럼 피어납니다.

여기 고려인의 고민처럼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의 삶은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이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또 보상받을 것인가? 저녁을 보드카 독한 술과 함께 먹으니 우리 일행의 대화도 자못 진지해졌습니다. 반쯤 놓은 정신 상태에서 오간 모든 대화를 기억할 순 없지만 그 중 하나는 자못 충격적이었습니다. “존경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렸습니다. 그래도 3년 동안 아버지가 그리워 기일에는 그 재가 뿌려진 바닷가에 가서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정성껏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아버지는 한 번도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승으로 즐겁게 가신 것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5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꿈에서 아버지가 슬프고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 오셨습니다. 놀라고 기뻐서 반갑게 달려나가며 아버지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지나가셨습니다. 너무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침대에 멍하게 앉아 있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지난 후에 사촌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건강하던 작은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통지였습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꿈은 자기가 만든다고 말했지만, 이런 꿈도 자기 마음이 혼자 멋대로 만들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나이가 드니까 세상은 그냥 물질적인 1차원적 평면이 아니고 혹시 무한한 차원으로 되어 있고, 우리 영혼도 여러 모습으로 변형되어 지속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러나 반쯤 깨어난 기고만장한 정신은 나에게 속삭입니다. 골치 아픈 철학은 그만 던져버려. 여기는 우즈베키스탄이야. 목화밭에서 일하는 아가씨도 김태희 보다 더 예뻐.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은 호랑이 같은 와이프는 만리 밖에 있다는 거야. 아까 연못 가 500년 된 뽕나무 밑에 앉아 있던 러시아계 복숭아 빛 피부를 가진 아가씨가 오랫동안 당신을 주목했잖아. 저녁놀이 길게 기울고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한 신사가 고독한 아가씨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옛날 비단을 팔러 온 화상처럼 질퍽하게 오늘을 즐겨봐.

내 앞에는 늘 그렇듯이 두 길이 나 있습니다. 정신도 욕망도 두 개로 쪼개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보이지 않는 신만이 나의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