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첫 사랑
또박 이효범
네가 사랑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소달구지 다니던 흙길로 걸어 들어가
빵집에서 새처럼 재잘대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를 만나겠어요.
사랑한다고 차마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문풍지의 바람이에요.
사랑은 보리밭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에요.
또 사랑은 둥근 금반지에요.
그러나 사랑은 깨진 거울이지요.
아, 사랑은 말로는 결단코 말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은, 진리보다 붉은 생명이에요.
네가 진실로 사랑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원이 넓은 낡은 양옥집에 걸어 들어가
고운 눈빛으로 미소 짓고 있는 머리가 하얀 여인을 만나겠어요.
가장 기쁜 순간에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후기:
사랑을 누가 알겠어요. 사랑 자체인 신도 아마 모를 겁니다. 신이 사랑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6일 째 되는 날 자기를 닮은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런 인간이 세상에, 자신을 저버릴 줄을 어디 알기라도 했을까요. 사랑은 만들고 부수고, 웃고 울게 하는 마술이에요.
그런데 서양에서는 그런 사랑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가 그것입니다.
에로스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잘 나타납니다. 보통 에로스는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행복 때문에 내가 불행해진다거나 또는 상대가 행복한 상태로 떠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분노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랑, 질투의 사랑, 탐욕의 사랑, 소유의 사랑, 음욕의 사랑입니다.
필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자세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우정을 뜻하고,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 없는 인생은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정은 행복의 조건이며 불행으로부터의 은둔처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이 좋은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 피를 나눈 형제 사이에도 존재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이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는 『신약성서』의 핵심단어입니다. 이것은 신적이고 은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부여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이 그 기반에 자리 잡은 감정으로, 아무런 이기심도 없고 은혜와 용서로 가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3가지 사랑 중에 보통 젊은 날 이성을 찾는 사랑은 에로스입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에로스를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결합하게 하는 우주적인 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특히 엠페도클레스는 사랑과 미움이 만물을 지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에로스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규명한 이는 플라톤입니다. 그의 『향연』에는 에로스의 모습이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중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상반되어 나타납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꿈꾸는 사랑은 충만하고 행복한 사랑입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사랑은 불완전, 비참, 결핍에 시달리는 사랑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남녀 양성의 신화를 들어 사랑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의 조상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해 볼 때 모든 것이 두 배였으며 우리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등과 허리가 둥근 球形의 몸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손이 넷, 발도 넷, 아주 둥글고 긴 목 위로 완전히 똑같은 얼굴이 둘 그리고 서로 반대쪽에 있는 두 얼굴을 하나로 합친 머리가 하나, 귀는 네 개, 생식기는 두 개가 있었고, 모든 나머지는 거기에 맞추어 있었습니다.
인간 조상에게 생식기가 두 개씩 있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세 가지의 성이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둘 다 남성 생식기인 경우, 둘 다 여성 생식기인 경우, 양성(남여성, anthrogunos) 모두를 가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남성은 태양에서, 여성은 땅에서, 양성은 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찌나 힘이 세고 용감했던지,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신들과 싸움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화가 난 제우스는 벌로서 그들을 위에서 아래로 마치 두부를 자르듯이 두 쪽으로 쪼개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통일성, 완전성, 행복은 두 동강이 났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나머지 반쪽을 찾아 과거의 완전했던 몸을 회복하려는 노력, 열망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는 오직 사랑만이 “우리에게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우리의 병을 고쳐서 행복하게” 해줍니다. 이런 사랑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한 남자가 나머지 짝을 만나는 경우, 그 만남은 하나의 기적이 되어 둘을 사랑과 신뢰와 애정으로 묶어 줍니다. 둘은 더 이상 한 순간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이란 우리의 본모습과 통일성을 회복시켜 주는 사랑, 온전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를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랑, 이승에서든 전생에서든 간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안겨주는 사랑입니다. 즉 근원적 통일성의 회복이 에로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와 달리 소크라테스가 그리는 사랑은 욕망입니다. 사랑은 특별히 결핍을 느끼는 어떤 대상에 대한 결정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핍된 것, 가지지 못한 것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극빈의 신 페니아(penia)와 풍요의 신 포로스(poros)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 두 반대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즉 에로스는 집도 절도 없이 신발도 못 신은 채 아름다움과 선을 찾아 헤매며 항상 불안에 떨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립니다. “에로스는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인 까닭에 그 운수도 이들에게서 얻게 된 것입니다. 첫째로 그는 항상 가난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답기는커녕, 도리어 딱딱하고 거칠고 신발도 없고 집도 없지요. 그래 늘 이부자리도 없이 땅바닥에 누우며, 문간이나 길가 같은 한데서 잡니다. 이건 그 어머니를 닮아 언제나 궁핍한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버지를 닮은 데도 있어서,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획책합니다. 또 용감하고 저돌적이고 열렬하며, 힘센 사냥꾼이요, 늘 모략을 꾸미며, 실천면에서의 지혜를 찾아 마지않되 여기에 성공도 하며, 온 생애를 통하여 애지자이며, 늘 놀라운 마술사, 독약 조제사, 궤변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리는 에로스는 결코 휴식이 없습니다. 불완전함은 에로스의 운명이며, 결핍은 에로스의 定義입니다. 풍요와 빈궁 사이, 지식과 무지 사이, 행복과 불행 사이, 그래서 방랑자 보헤미안의 아들 에로스는 언제나 결핍을 느끼면서 길 위를 떠돌며 방황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진실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인 욕망과 결핍은 충족되는 순간 더 이상 욕망과 결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망과 결핍은 만족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사랑의 파라독스가 있습니다. 결핍이 지배하면 사랑의 고통이 오며, 결핍이 충족되면 사랑은 끝납니다. 이런 파라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육체에 의한 것이든 또는 정신에 의한 것이든 간에 아름다운 것을 분만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할 수 있는 한 영속과 불멸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미덕에 관한 철학적 에세이』에서 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들이 불멸에 이르는 가능한 방법이 생식이다. 교체는 영원성이자 신성이다. 어른의 아이 사랑, 영광의 사랑은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들을 강박하는 것은 죽음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요 불멸이다.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아쉬워하는, 그래서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러면서도 그럴 수 없어서 죽음에 시달리는 생명 자체이다.”
이런 사랑의 절대 결핍, 절대 궁핍, 절대 불행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출산을 통해서입니다. “출산이, 可死者에게 있어서는, 영생하고 불사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모름지기 不死를, 선한 것과 함께 욕구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합의를 본대로 사랑이란 것이 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 하는 것이라고 하면 말이에요. 이상 말해 온 것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은, 사랑도 불사를 위해서 있는 거라고 하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육체에 의한 출산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정신에 의한 출산을 합니다. 소위 창작입니다. 창작에는 예술적 창작도 있지만 과학적 창작, 철학적 창작, 정치적 창작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이 진정한 사랑의 탈출구일까요?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登攀式 변증법입니다. 이것을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사랑의 행로, 미의 구원, 등반식 변증법의 사랑이란 사랑을 따라가되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되 사랑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사랑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등반식 변증법이란 일종의 정신적 등반으로서 秘傳 傳授의 길 또는 구원의 길입니다. “한 육체를 사랑하며 거기서 아름다운 言說을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엔 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다는 것과, 또 아름다움을 본질에 있어서 추구하고 보면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이 결국 동일한 한 가지 것임을 믿지 않는 것이 크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모든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한 육체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여 그것이 지극히 적은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그 한 육체에 대한 강렬한 정욕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엔 정신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누구든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설사 그 용모가 그다지 환하지 못할지라도 만족하여 사랑하고 보살펴 주며, 그리하여 자식을 낳고 또 그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해줄 만한 이야기 거리를 찾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면 그는 더욱 우리의 여러 가지 제도와 법률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보게 되며 또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연줄로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며, 따라서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잘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제도나 법률 같은 것으로부터 지식에로 나아가,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지식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등반은 마침내 절대적이고 영원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아름다움, 모든 다른 아름다움을 잉태하거나 발원시키는 아름다움 그 자체, 즉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인도해서 사랑과 우리를 구원받게 해주는 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사랑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말하자면 오직 종교라는 말입니다.
그리스 철학을 끌어 들여 장황하게 사랑을 이야기 했습니다. 원래 철학이 그렇습니다. 쉬운 것을 어렵게 이야기 하여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철학자 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용기를 내어, 나의 첫 사랑 이야기를 써 봅니다. 아직 호랑이 같은 아내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인데, 이렇게 공개했다가 내일 아침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효범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4, 퇴직 이후) (0) | 2020.02.11 |
---|---|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3, 연비어약) (0) | 2020.02.09 |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1, 부하라의 프라타나스) (0) | 2020.02.03 |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0, 시골풍) (0) | 2020.01.30 |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9, 인생을 다시 산다면) (0) | 2019.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