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8, 비와 말)

이효범 2019. 10. 7. 09:57

o 비와 말

 

구녕   이효범

 

봄비 오시는 날

강가에서 만난 당신.

 

내리는 비가 황금이 아니어서 참 좋다

마른 들판을 적시고 있어 너무 신난다.

 

내리는 비가 화살이 아니어서 참 좋다

우산을 받쳐도 찢어지지 않아  너무 안심이다.

 

당신의 말이 화살이 아니어서 참 좋다

가까이 속삭여도 심장이 찔리지 않아 너무 안심이다.

 

당신의 말이 황금이 아니어서 참 좋다

웃으며 일상에서 가볍게 던질 수 있어 너무 신난다.

 

o 후기:

지상에서 가장 신비한 것 중 하나는 물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물을 만납니다. 액체의 물, 고체의 얼음, 기체의 수증기. 이런 물은 생명이 가능할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는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이 흐르는 길이 강입니다. 강 또한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홀로 금강 가를 걷다보면 매 순간 매 장면이 동양화의 빼어난 모습이 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강을 주시하면 강은 아름다움을 넘어 꿈틀거리는 용과 같습니다. 고요와 격정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강, 그것은 물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걸작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쉼 없이 흘러 강을 만들고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합니다. 그런 모습에서 노자는 도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늘 물과 같이 삽니다. 매일 물을 마셔야 하지만 매일 물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살았던 대전은 3개의 하천이 흐릅니다. 대전천, 유등천, 갑천이 그것입니다. 그것들은 대전 MBC 주변에서 하나로 합쳐져 금강의 본류로 이어집니다. 또 그것은 세종에서 충북 청주에서 오는 미호천과 합류하여 공주, 부여를 지나 황해로 빠져나갑니다. 그런 금강 가에서 온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금강의 발원지를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졌나. 강원도 남대천의 연어도 죽을 때는 먼 태평양을 돌아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인간도 동물인 이상 歸巢本能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이 있는 長水에 가보았습니다. 장수는 전북 동쪽의 험한 산악지역을 이루고 있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의 한 군청 소재지입니다. 나는 장수 주변을 지나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장수 읍내에 들어가 머문 적은 없었습니다. 우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의 장수IC에서 빠져 나와 장수군청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관청 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에 낯선 곳에 갈 때는 군청에 가서 차를 세우고, 정보나 음식 등 그 주변에서 해결하면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나는 늘 함께 가는 동료에게, 군청에 가서 군수를 만나 혼내주어야겠다고 농담을 하면서, 군청으로 차를 몰곤 합니다. 그렇게 찾아간 장수군청은 읍내 규모에 비해 너무 큰 건물이었지만 건축의 거장이 설계한 것 같은 현대적인 멋진 외모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한 것은 군청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500년 된 소나무였습니다. 소나무가 지천으로 깔린 우리나라이지만 아니 어찌 이런 소나무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휘어진 가지 마디마디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용트림하는 모습에서 나는, 로마 바티칸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라오콘 군상을 떠올렸습니다.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은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입니다.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이 바다뱀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온 몸이 뒤틀어지고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처절한 모습을 이 소나무가 하고 있다니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아 한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가까스로 멍멍한 머리를 수습하고 군청 가까운 곳에 있는 곤지암할매소머리국밥에 갔습니다. 주인아줌마가 낯선 여행객에게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싫지 않았고 음식도 맛이 있었습니다. 후따닥 국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우리는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똔봉샘으로 향했습니다. 새로운 곳을 갈 때는 첫사랑처럼 설레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차가 神舞山 입구 水分里 마을 옆에 있는 뜬봉샘 생태공원 주차장에 들어섰습니다. 금강 발원지를 기려 생태공원이 아기자기하게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원을 올라 897m의 신무산 8부 능선에 샘이 있었습니다. ‘뜬봉샘이라는 이름은 봉황이 날아간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무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 하던 중에 봉황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는데, 그 자리에 옹달샘이 있어 뜬봉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곳에서 발원한 물이 1,000(397.25km)를 흘러 서해로 들어갑니다.

샘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돌로 샘의 사면을 쌓았는데, 바닥에서 물이 솟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샘에서 넘쳐나는 물도 많지 않아 기꺼이 샘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샘 주변과 조그만 물줄기 주변은 돌로 아담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 어머니의 자궁처럼 여기가 바로 금강의 발원지란 말인가. 끝은 장대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미미하다는 말인가. 거의 산꼭대기에 샘이 있다는 것은 신기하였지만, 큰 기대를 하였기 때문인지 조금은 실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수분리에서 물이 남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이 된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다같이 내린 물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쪼개져 하나는 섬진강 물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금강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한 순간의 선택이 그의 전체의 생을 지배합니다. 순간의 선택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나를 벗어난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그 책을 보지 않았다면,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나의 일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책을 보고, 그곳에 가게 되었던가? 나는 모릅니다. 금강의 수원지에 와서도 나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논개의 사당에 들렀습니다. 지금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 멋진 한복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그렇지, 여기 장수가 논개의 고향이지. 논개는 이름이고, 호은 義巖이며, 성은 신안 주씨였습니다. 논개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숙부집에 위탁하게 되었는데. 못된 숙부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넘겼습니다. 그 모진 운명을 구한 것이 최경회라는 현감이었습니다. 논개 나이 17세에 그들은 부부의 예를 올렸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회는 7民官이 전사한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고, 그의 여인 논개는 게야무라 로쿠스케라는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습니다. 한 여인의 장엄하지만 너무나 애초로운 삶입니다.

논개의 일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광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사당 돌계단에 앉아, 멀리 팔공산을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사람과 地理歷史天文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최경회와 논개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논개의 충성과 절개는 진정으로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이 산 이곳 장수에는 금강의 발원지가 있습니다. 그곳을 보려고 70이 가까운 내가 흰머리를 날리며 찾아왔습니다. 군청 앞에는 아는지 모르는지 늙은 소나무가 아직도 나처럼 지상의 고통의 늪에서 하늘로 승천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