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71. 공주를 사랑했네)
o 공주를 사랑했네
구녕 이효범
나는 공주를 사랑했네.
공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고향처럼 공주를 사랑했네.
바람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지고 도망쳐 세운 도시
그 운명을 사랑했네.
그 먼 후손도 세상 물정 모르고 빗장을 걸어 잠거 시대에서 밀려난 도시
그 콧대를 사랑했네.
휘몰아 돌아가는 강물은 북에서 오는 외적을 막고
주위에 솟은 고개는 동에서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함이었네.
그러나 때가 오면 노를 힘차게 저어 바다로 나아가려는 배
그 기상을 사랑했네.
아, 나는 공주를 사랑했네.
허물어진 성곽 밑을 거닐며 나지막이 노래 부르고
강가에 지는 저녁노을을 사랑했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얼큰한 칼국수로 배를 채우고
산 같은 왕들의 무덤 뒤에서
우리가 산다는 일이 무엇인지
바보처럼 울면서 공주를 사랑했네.
젊음이 다가도록 나는 공주를 사랑했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공주를 사랑했네.
공주의 시간을 사랑했고
공주의 하늘을
공주의 어린 아이들을 남모르게 사랑했네.
이제 나이 들어 고백하건대
나의 사랑은 봄에 핀 들꽃이었네.
새처럼 뾰족한 부리로 영역을 지키지도 못하고
부자처럼 호화스런 저택을 짓지도 못하고
심지어 어떤 시인처럼 시로써 동네 담벼락을 점령하지도 못한
장에서 사온 싸구려 분가루 같은 향기였네.
그러나 그 향기로 나의 가난한 삶은
오래 오래 썩지 않았네.
후기:
나는 1982년부터 2019년까지 공주에 있는 공주대학교에 근무했습니다. 28세부터 65세까지니까, 나의 생애의 대부분을 공주에서 보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주사람입니다. 공주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나의 공주 사랑은 너무나 작고 너무나 미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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