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그대로 앉아서 볼 수만은 없지 않느냐? 내 비록 몸은 늙었으나, 의병을 모아 적과 싸워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소자도 형님과 함께 의병이 되어 싸우겠습니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터져 조선의 남부 지방이 왜구의 발길에 짓밟히던 무렵이었다. 고경명의 집에서는 고경명과 그의 아들 종후, 인후가 의병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너희들이 내 뜻을 알아주니 참으로 믿음직스럽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고경명은 노인답지 않은 높은 기개를 보였다.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곧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 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겠습니다.”
“이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야 말겠습니다.”
비록 몸에 익힌 무술은 없지만, 의기만은 하늘을 찌를 듯이 넘치는 젊은이 들이었다. 고경명은 천 명이 넘게 모여든 이들을 맞아들여, 의병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시켰다.
“자아, 지금부터 북쪽으로 출발한다! 모두들 내 뒤를 따르라!”
고경명은 의병을 거느리고 북으로 북으로 전진했다. 의병대가 충청남도 금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버님 관군입니다. 관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오, 그럼 이 곳에서 전투가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곧 왜군과의 대 전투가 있을 것입니다.”
“좋다! 관군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자!”
이렇게 하여 의병대는 금산에서 수많은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의병의 참패로 끝났다. 짧은 시일 안에 모집된 우리의 의병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진 훈련된 왜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턱없이 힘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고경명과 그의 아들 인후,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이 금산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버님!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아 이 나라를 구하고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 앞에서 고종후는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고종후는 다시 각지에서 의병을 모아, 그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의병들은 고종후를 ‘복수 장군’이라고 불렀다. 고종후가 언제나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지방이 왜군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고종후는 의병을 이끌고 경상도로 내려갔다. 하동에 이르렀을 때,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진주성이 위험하다! 한시바삐 진주로 가자!”
진주성이 왜군에 포위된 지 9일째 되는 날, 고종후가 이끄는 의병이 진주성에 들어갔다.
싸움이 시작되자 왜군들은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진주성의 용맹한 장수 여러 명이 싸움터에서 숨져갔다. 고종후는 김천일, 양산수 등의 장군과 함께 왜군에 맞아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그 많은 왜군들을 물리치기에는 너무나 힘이 모자랐다. 사로잡힐 위기에 처한 고종후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내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에게 내 목숨을 내줄 수는 없다!”
그러고는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종후의 효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