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 대학자인 ‘삼은’은 목은 이색,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를 말한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살았던 길재는 11세 때, 도리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같은 학자 밑에서 학문을 익힌 다음 과거에 급제하였다. 길재는 문장이 빼어났기 때문에 주로 후배들을 가르치는 벼슬을 맡았다. 그런데 4년 동안 후배와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는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어지면서 그만 벼슬자리가 싫어졌다.
‘짧은 학문으로 후배들을 가르친답시고 늙으신 어머니를 외롭게 하다니, 그렇다, 어머니 곁으로 가서 정성껏 모시는 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그런 그를 막았다.
“야은, 나라에서는 자네의 학식을 필요로 하고, 집에서는 자네의 효성을 필요로 하네. 그러나 사나이 대장부라면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에 길재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야말로 진실로 큰 것이 무엇이며, 진실로 작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네. 얼핏 보기에는 나무의 열매가 가장 으뜸인 것 같지만,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었겠나. 어버이가 뿌리라면 열매는 세상의 부귀영화일세. 뿌리가 날로 메말라 가는데도 어찌 열매만 쳐다보란 말인가?”
그 길로 벼슬을 그만둔 길재는 고향 초가집의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아,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데,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던가!’
4년 만에 다시 만난 모자는 그 날 밤, 호롱불 밑에서 날이 훤하게 밝아올 때까지 못 다한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었다. 이런 길재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서, 저녁에 잠자리를 깔아 드릴 때나 아침에 이부자리를 개어드릴 때 늘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같은 효라도 마지못해 하는 효와 마음에서 우러나서 기꺼이, 즐겁게 하는 효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길재의 어머니는 다 큰 아들이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민망스러워 몇 번이나 말렸다. 하지만 길재는 막무가내였다.
“어머니,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길재의 효성은 어릴 때부터 시작하였다. 길재가 어릴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보성대판 벼슬에 임명되자,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보성으로 갔다. 그 바람에 길재는 한동안 외가에서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했다. 여덟 살 된 어린 길재는 시냇가에 나갔다가 새끼 자라 한 마리를 잡았다.
“야 자라다! 자라가 모가지를 길게 뽑는구나!”
자라를 처음 잡아 본 길재는 신기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잠시 후 길재는 울먹이며 자라를 다시 강물에 놓아 주었다.
“나 때문에 자라가 어미를 잃게 되었구나!”
그러고 나서 길재는 시 한수를 읊었다.
자라야 자라야
어미를 잃었느냐
나도 너처럼 어머니를 잃었단다.
내가 너를 잡아먹으려 했으나
어미 잃은 네가
내 처지와 같으니
너를 놓아 주노라
1392년, 고려는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첫 임금이 되었다. 그 때 이성계의 아들 중 나중에 조선 제 3대 임금 태종이 된 이방원은 길재와 더불어 학문을 익힌 글벗으로서 길재의 인품과 글재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재에게 높은 지위를 내릴 터이니 고향에서 나와 벼슬살이를 하라고 권했다. 그 때 길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법이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거늘, 그런 이치를 뻔히 알면서 어째서 벼슬길에 나서겠는가. 바라건대 고향의 초가에서 늙은 어머니 봉양이나 하게 해 주시오.”
성격이 거칠고 고집이 세기로 소문난 이방원이었지만, 길재의 마음속을 잘 알고 있는지라 아쉽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길재는 고향에 묻혀 살면서도 결코 한가롭게 지낼 수가 없었다. 그의 높은 학문을 알고 있는 젊은이들이 공부를 하고자 그의 초가집으로 물려들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제자가 백 명도 넘었다고 하니, 길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길재는 3년 동안 엿이나 과일 같은 단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젓갈․장조차 멀리했다고 한다.
<길재의 효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