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은 29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김만중이 어머니에게 절하고 무릎을 꿇었을 때, 윤씨 부인은 평생 처음으로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12년 전 맏아들 김만기가 21세로 과거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윤씨 부인은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만중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가엾은 아들이었다. 김만중이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이 때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청나라와 화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분해서 그만 자결을 해 세상을 뜬 것이다.
“어머니, 이제부터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습니다.”
눈물 흘리는 어머니 앞에서 김만중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고맙다. 내 생전 오늘같이 기쁜 날은 처음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잔치라도 벌이자.”
윤씨 부인은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사실 윤씨 부인으로서는 몇 년 만에 여는 잔치인지 몰랐다. 남편이 죽은 뒤로는 한 번도 잔치를 열지 않았고, 또 남의 잔치에도 참석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막내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만은 달랐다.
“이것은 온 집안의 경사지, 내 자신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기꺼이 잔치를 열기로 한 것이다. 잔치 전날 밤, 김만중은 형 만기와 마주앉아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오랜만에 잔치가 열리는데, 우리가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릴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형도 찬성을 하며 되물었다.
“어머니가 가장 즐거워하시는 게 뭘까?”
“형님, 예로부터 부모님은 자식이 재롱부리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신다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식이 아무리 머리가 세어도, 부모의 눈에는 어린 아이로 보인다고 했지.”
“그러니까 내일은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립시다, 형님.”
김만중은 형 만기와 함께 약속했다. 이튿날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만중과 만기는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 나타났다.
“어머니, 저희 형제가 어머니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니, 저희 형제가 어머니 앞에서 춤을 추어 드리겠습니다. 즐겁게 보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난 형제는 마치 아이들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른이 색동옷을 입은 것도 우스웠지만, 수염을 까딱거리며 어린 아이들 흉내를 내는 모양은 턱없이 우스웠다.
“원, 너희들도…….”
윤씨 부인은 주름진 얼굴에 밝은 웃음을 활짝 피웠다.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보자, 형제는 한층 흐뭇했다. 그들은 더욱 흥을 내어 춤을 추었다. 잔치에 모인 사람들도 웃음을 머금고 그들의 춤을 지켜보았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효도하려는 김만중 형제의 뜻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웃음보다는 오히려 콧날이 시큰해질 정도로 감동에 젖어 있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속으로 김만중 형제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아울러 온갖 고생 속에서도 두 아들을 훌륭히 길러 낸 윤씨 부인에 대해 새롭게 감탄을 보내었다. 이 날이야말로 어머니의 사랑과 높은 덕, 그리고 김만중 형제의 효성이 한데 어울려 아름답게 만난 날이었다.
김만중은 벼슬이 지경연사(임금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높은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그 무렵 조정에 시끄러운 일이 생겼다. 궁녀 장씨가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되어 후궁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을 옳지 않게 생각한 신하 김창협이, 궁녀 장씨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므로 후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숙종에게 아뢰었다. 이 말에 숙종은 크게 화를 내더니, 김창협에 대한 벌을 당시 영의정이었던 그의 아버지에게 덮어씌웠다. 이를 본 김만중은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자식에 대해 노여움을 그의 아버지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이 상소문을 읽은 숙종은 버락같이 화를 내며 김만중을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 김만중이 평안도 선천 땅으로 귀양길을 떠나던 날 아침, 윤씨 부인은 성 밖에까지 그를 따라 나왔다.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김만중은 포승에 묶인 채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걱정 말아라. 나는 오히려 귀양 가는 네가 자랑스럽다. 어미를 섬기는 것만이 효도가 아니다. 나라를 위해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이 어미에게 더 큰 효를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러한 말을 듣고 김만중은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김만중의 첫 번째 귀양은 1년 만에 풀렸으나, 궁녀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가 다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남해의 외딴 섬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함으로써 더 큰 효도를 한 것이다. 김만중은 여기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위해 ?사씨남정기?와 ?구운몽? 등의 소설을 써서 우리나라 한글 소설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김만중의 효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