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48, 겨울 얼굴)

이효범 2020. 11. 14. 08:18

 

o 겨울 얼굴

 

구녕 이효범

 

 

얼굴이 변했다.

시장 바닥을 닮아있다.

영혼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주름진 지폐만 축축하게 남아 있다.

눈은 사물을 적확하게 보지 못하고

귀는 싫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빨 빠진 입은

무슨 말을 그리 주저리 중얼거리는지

비오는 날 미친 놈 같다.

깨어나라.

돼지 대가리가 아니고

사람 머리라면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올려보아라.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고

들리지 않은 기도를 들을 때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갓난아기처럼 다가가 비비고 싶어진다.

 

후기:

사람의 얼굴은 신비한 영혼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영혼을 가리는 장막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고령 현역 의사로 활동하다 올해 94세로 소천한 한원주 매그너스요양병원 내과과장의 얼굴에는, 테레사 수녀처럼 천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문구가 달린 빨간 모자를 눌러 쓴 트럼프의 얼굴에는 탐욕과 증오가 가득합니다.

두 눈으로 사물의 양과 음을 요리조리 입체적으로 두루 살펴보고, 두 귀로 좌우의 숨겨진 소리까지 모두 듣고, 그리고 중앙에 뚫린 하나의 입으로 자기의 바른 생각을 담대하게 말하라고 얼굴은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런 얼굴값도 못하고 삽니다. 동물처럼 먹이와 쾌락만 찾아 돌아다닙니다. 머리를 버리고 동물처럼 대가리만 달고 살고 있습니다.

출근 할 때는 거울 앞에서 매일 보았던 얼굴인데, 퇴직을 하니 거울을 본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 모처럼 여자 동창과의 모임이 있어 거울 앞에 서니 문득 나의 얼굴이 낯설게 보입니다. 화장을 짙게 한다고 고쳐질 수도 없고, 더군다나 다른 얼굴과 바꿀 수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