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8, 아르메니아 여행기)/ 구녕 이효범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걸어서 사다클로의 국경을 넘는 길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들어가는 것보다 짧고 편했습니다. 아르메니아로 넘어오니 정장을 하고 넥타이를 맨 버스기사와 조금 살이 쪘지만 매혹적인 여성 가이드, 그리고 검은 구렛나루가 짙고 눈이 예사롭지 않은 28세 총각 통역관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통역관은 가이드가 우리말을 못해 통역을 해주는 또 다른 가이드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일이 있어 대신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8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서울시립대학 대학원에서 교통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고국에 온지가 7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늦게 한국을 떠났다고 웃었습니다.
그는 일 년 전에 아르메니아에서 한 명도 죽지 않은 명예로운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국민들은 현 총리(니콜 파니시안)를 절대 신뢰하고 있고, 45세인 젊은 총리는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그래서 이전 독재자들은 유치원 내각이라고 조롱한다고 함) 富를 독점하고 있는 재벌을 강력하게 개혁하고, 전국토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한국을 너무 좋아하고, 현재 서울에서 서울대학교를 나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아르메니아 여성과 내년에 결혼할 예정이지만, 새로 출발하려는 고국에서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300만 명의 작은 인구에, 코카서스 세 나라 중에서 가장 못사는 이 소국에 갑자기 관심이 가고, 무엇인가 이 나라의 미래가 아주 밝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통역관은 부존자원이 없는 아르메니아가 살 길은 굴뚝 산업을 건너 뛰어 IT산업에 투자하는 것밖에 없다고 해서 나는 깜작 놀랐습니다. 아니 이 시골 나라, 돌의 나라(Stone Country)에 최첨단의 IT가 가능할까? 지금 아르메니아는 북쪽은 조지아, 동쪽은 아제르바이잔, 남쪽은 이란, 서쪽은 터키로 둘러 싸여, 터키와는 20세기 초에 자행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국경이 봉쇄되어 있고, 또 아제르바이잔하고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때문에 영토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폐쇠된 지역에 국제적인 연락망이 필요한 4차 산업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통역관은 나의 의심을 눈치 챘는지, 아르메니아는 이미 IT산업이 굉장히 발전했으며, 또 모든 학생들을 열심히 교육시키고 있으며, 전문가도 많으며, 외국에서도 주목하여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길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반신반의 하였습니다.
우리의 아르메니아 여행은 이런 첨단산업의 시찰이 아니라 주로 수도원과 교회에 쏠렸습니다. 우리는 여러 곳을 둘러보았지만 특히 내게 인상적으로 남는 곳은 호르비랍 수도원과 게하르트 수도원 그리고 에치미아진 성당과 박물관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입니다. 301년에 공인되었으니 로마보다 36년이나 앞섰습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는 오리엔트정교에 속해 있지만, 아르메니아에서 포교활동을 한 12사도의 한 사람인 타다이와 그를 이은 발트로마이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그리고르와 ‘로마의 처녀들’이라고 불린 40인의 여성 때문이었습니다. 알샤크 왕조의 최고 지도자 드르다트 대왕은 서서히 세력을 키워오는 기독교에 두려움을 느껴 열혈 신자인 그리고르를 올비랍 수용소에 투옥시켰습니다. 또 대왕은 로마의 처녀들도 체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미모가 뛰어난 립시메를 보고 한 눈에 반해 결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신과 이미 결혼한 립시메는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대왕은 립시메 뿐만 아니라 로마의 처녀들까지 함께 무자비하게 처형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대왕은 이름 모를 중병에 걸렸습니다. 위중한 대왕 앞에 여동생이 다가와 자기가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 속에서 “그리고르를 석방한다면 그가 드르다트를 병으로부터 구제할 것이다.”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지막 희망으로 왕은 그리고르를 석방하고, 그리고 그리고르의 기도로 왕의 병은 치유되고, 그후 왕은 그리고르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렇게 진행되어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호르비랍(KhorVirap) 수도원에 가면 그리고르가 14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 지하 20m의 감옥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비좁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았는데 올라올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어떤 외국인 할머니가 올라오면서 “I did it“이라고 환희에 차서 소리쳤던 모습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교회건축을 잘 모르는 나는 이 수도원이 가진 건물의 의미를 말할 수는 없고, 여기서는 성경에 나오는 아라라트 산이 코앞에 아주 잘 보인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는 5165m의 아라라트(Ararat)산은 대아라라트와 소아라라트(3896m) 라는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지고 지금은 모두 터키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호르비랍 수도원의 바로 앞에는 우리의 휴전선처럼 철조망이 처져있고, 그 뒤로 작은 강이 흐르며, 그 뒤로는 터키의 철조망 그리고 만년설로 뒤덮인 아라라트 산이 신비롭게 불쑥 솟아있습니다.
슬프게도 국경이 막혀 있는 아라라트 산은 아르메니아인의 성지로서 그들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산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시조인 하이크 나하벳 장군이 노아의 玄孫(손자의 손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손대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죽으면 이 산 주위에 묻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1차 대전 당시 터키(오스만 투르크)가 150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700만 명의 디아스포라(Diaspora) 아르메니아인들이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600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홀로 코스트(Holocaust) 한 것보다 더 이전에 벌어진 비참한 역사입니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일본이 우리에게 하는 것처럼, 이 사건은 소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계획한 체계적인 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내전이라고 발뺌하고 있지만, 현대사 최초의 집단 학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도 예레반에는 우리의 독립기념관처럼 이를 기리는 ‘학살기념관(Genocide Monument and Museum)’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빛바랜 사진 속에서 죽음을 앞에 둔 소년들의 눈동자를 보고 너무 슬픈 나머지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위쪽에 건립된 추모탑 속 영원한 불꽃 앞에 서서 그들의 영혼의 구원과 이 나라의 평화를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수도 예레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자트(Azat Vally) 계곡에는 ‘돌의 심포니’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가 신비스럽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계곡 맨 위쪽의 가파른 절벽에 세워진 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은 정말 대단한 곳입니다. 우선 경관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어디를 가 봐도 널려 있는 멋진 하츠카르(khachkar)가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하츠카르는 십자를 의미하는 ‘하츠’와 돌을 의미하는 ‘카르’가 합성된 말입니다. 이런 하츠카르는 옥외에 탑처럼 만들어진 것에서부터 벽에 새겨진 것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하츠카르의 십자가 모양은 ‘생명의 나무’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에덴동산이 나오고, 그곳에는 그 열매를 따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생명의 나무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십자가 문양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돌에 새긴 것이 하츠카르입니다. 또 이곳에는 한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찌른 창(게하르트)과 사도 요한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보다 100년 동안 바위를 파서 만든 큰 동굴 교회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닥은 지금도 차고 맑은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그 위층 동굴은 넓고 비었습니다. 여기서 노래를 부르면 공명이 일어나 아름답게 들립니다. 마침 우리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어떤 중년의 남자가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옛날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1년 있었을 때 나는 가끔 아치로 된 대학건물 화랑에서 대학생들이 합창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곳은 그곳보다 훨씬 더 울림이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열열이 앙코르를 외쳐 천상의 노래를 한 곡 더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맛보았습니다. 사람이 뜸한 틈을 타서 나도 박목월이 작사한 ‘기러기’를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음의 나의 목소리는 그렇게 매혹적으로 반영되지 않아 중간에 그만 두고 나와 버렸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창은 지금은 에치미아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검게 생긴 조그만 창인데 글쎄 저 창이 정말로 역사 속 실존 인물인 예수를 직접 찔렀을까요. 이런 창이 세계에 3개가 있다고 하는데 과학적인 검증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통역관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곳 에치미아진은 그리고르가 드라다트 대왕을 위해 기도드렸던 장소인데,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에치미아진 대성당이 세워져 있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총본산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먹는다고 하는 고풍스러운 깊고 넓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도원을 걸으니 모처럼 여행의 기분에서 벗어나 무언가 성스럽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Yerevan)은 100만 명이 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랑스런 도시입니다. 2008년은 예레반이 2800년이 된 해이니 여기는 로마보다도 28년이나 앞선 도시입니다. 멀리 아라라트 산이 보이고 건물들은 아르메니아에서 많이 나오는 토화석과 바자르토석을 부쳐 핑크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핑크도시(The Pink Cit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는 이 도시 중앙의 공화국 광장을 아내와 함께 거닐면서 긴 여행에서 오는 약간의 피로를 느꼈지만 낯선 곳의 이국적 풍경으로 인해 홀가분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느릿느릿 걷다가 어느 노천카페에 들려 우리 부부는 민트와 레몬에 섞인 차를 마셨습니다. 천국의 맛이었습니다. 아내도 차가 참 맛있고 남편이 멋져 보인다고 잘 안 하던 칭찬을 하였습니다. 고운 저녁 햇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예레반 시내를 투어했습니다. 7만 명이 들어간다는 종합경기장을 지날 때 축구를 좋아한다는 통역관은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했고, 브라질에서 발전했으며, 아르메니아에서 죽었다.”고 말해 우리를 웃겼습니다. 여러 의미 있는 곳을 들렸지만 나는 캐스케이드와 아라라트 브랜디(Ararat Brandy)사의 방문이 특히 인상에 남습니다. 산 한쪽을 깎아 만든 아직 미완성의 캐스케이드는 현대미술관을 겸한 공원이었지만 참으로 근사했습니다. 나는 이곳 아트숍에서 촛대 하나를 우리 돈 7만원에 샀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취미로 촛대를 모았는데 이제는 짐이 되어 그만 둔 것을, 예쁜 촛대를 보니 옛날 버릇이 도져 기어코 다시 사고 말았습니다. 사기는 했지만 한 150여개가 넘는 촛대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걱정이 많습니다.
아라라트 브랜디사는 구소련시절에는 ‘아르메니안 코냑’으로 불린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을 만드는 브랜디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년산 코냑과 6년산 코냑을 비교하며 시음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차이를 잘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되고 비싼 술이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닐까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우리는 브랜디를 사는 대신에 선물용으로 ‘아라라트’라는 상표가 붙은 유리잔 2개와, 등산을 갈 때 코냑을 넣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만든 조그맣고 멋진 스테인리스스틸 통을 3개 샀습니다.
18일 동안 코카서스 3국을 흥미롭게 여행하였습니다. 모처럼 늙은 아내와 어린이처럼 손을 잡고 오손도손 잘 보았습니다. 세 나라는 서로 비슷했지만 차이도 많이 났습니다. 내게는 우리보다 훨씬 가난했지만 더 행복한 나라들로 보였습니다. 여행은 익숙함으로부터 떠나 진정으로 나를 찾아 돌아오는 과정입니다. 또 여행은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아가는 경탄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문제도 많았습니다. 이번 여행으로 멀고 낯선 곳으로 느껴졌던 세 나라가 이웃처럼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부디 모두 안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공항에서 아르메니아 통역관을 진심으로 껴안으면 말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 사는 것을 언제든지 환영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조국 아르메니아에서 더 의미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 배운 지식으로 예레반의 심각한 교통문제를 해결하고, 코카서스 3국이 비록 종교가 달라 힘들지 모르지만 서로 전쟁으로 가지 말고, 연방제처럼 굳게 뭉쳐 많은 사람들이 희망으로 찾아오는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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