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33, 탈레스씨, 그건 아니잖아요)

이효범 2020. 8. 7. 18:07

o 탈레스씨, 그건 아니잖아요

 

구녕 이효범

 

 

세종 호수를 걸었습니다. 산책로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코로나로 조심이 되어 한적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나라가 계속 번영할 수 있을까? 코로나 이후에도 여유로운 점심을 먹을 수 있을까? 인간에게 도덕적 진화는 가능할까? 걱정할 것이 많아 오래 걸었습니다. 그런데 꺾어지는 코너에서 자전거와 부딪쳤습니다. 거창한 일만 생각하다 주변을 잊었습니다. 가늘게 먹은 귀가 경적을 놓쳤습니다.

여기는 자전거 전용도로입니다.” 넘어진 사람이 화가 나서 외쳤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탈레스가 맞받아쳤습니다. “자전거 전용도로인데 자전거도 아닌 당신은 왜 거기 있는 거요.” 어이없는지 그 사람은 동물원에서 원숭이 쳐다보듯 빤히 노려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세상이 물로 되었다는 사람과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늘의 별만 바라보다 발 밑 도랑에 빠져 옷을 버린 싱거운 사람과는 말이 통할 리가 없지요. 심지어 그런 류의 사람들은 매일 밥을 먹으면서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깁니다. 또한 목소리를 높여 마치 실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이 생겼다고 강변 합니다.

철학자, 사내, 아낙네, 임금, 평민, 물고기, , 개구리, 심지어 해면 등 온갖 모습으로 윤회를 두루 경험하고 나서 피타고라스는 수탉의 몸으로 환생하였습니다. 인간보다 불편한 동물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연이 부여한 한계에 만족하고 사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애쓰기 때문이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신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국가의 장래를 정신없이 걱정하는 사람이, 쩨쩨하게 자전거전용도로는 자전거 타는 사람은 안 되고 자전거만 다녀야 한다고 우겨요. 우리가 쓰는 언어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탈레스씨. 제발 정신 차리세요. 누가 봐도 웃겠어요,

 

후기:

그리스 철학자 중에 엘레아에서 활동한 제논이 있습니다. 그가 주장한 역설은 유명합니다. 그 중에 네 개가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에서 가장 발이 빠른 아킬레스 용사는 앞서 출발한 느림보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 둘째, 운동이 실재한다면 물체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날아가는 화살을 찰나의 순간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특정한 지점에 멈추어있다(화살의 역설). 셋째, 화살은 과녁을 맞힐 수 없다. 물체가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간다고 할 때 중간 지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이러할 때 물체가 도착점을 향해 절반을 가고, 다시 남은 거리의 절반을 가고, 또 다시 남은 거리의 절반을 가는 현상이 무한히 일어나므로, 유한한 시간 동안 물체는 다른 목표점에 도달할 수 없다(이분법의 역설). 넷째, 사람들의 체격과 수가 동일하게 구성된 세 개의 행렬이 경기장에 줄맞춰 있다고 하자. 하나의 행렬(A)은 멈춰있고, 나머지 두 행렬(B,C)이 동일한 속도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일 때, B행렬에 있는 사람은 A행렬에 있는 사람 한명을 지나치는 시간 동안 C행렬에 있는 사람 2명을 지나치게 된다, 동일한 시간 동안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만, 움직임의 양이 달라진다(경기장의 역설).

제논의 주장은 실제와 일치되지 않습니다. 아킬레스는 쉽게 거북이를 따라잡고, 화살은 날아가 과녁을 맞힙니다. 어딘가 그의 논리적 추론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제논은 그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을 지키기 위해 이런 이상한 논증을 제시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진실한 실재는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변화나 운동을 거부하였습니다. 제논은 운동을 인정하면 이런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눈으로 보면 세상은 변화무쌍하지만 이것은 실재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이성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때만이 진리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들인 서양의 철학자들은 감각보다는 이성과 논리적 추론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런 사유의 방식은 많은 업적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 소피스트처럼 억지를 부려 失笑를 자아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정말로 액면 그대로 자전거만 갈 수 있는 도로입니까? 그러면 자전거 타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사람 없이 자전거가 어떻게 갈 수 있지요? 상식적으로는 누구나 아무 문제없이 알아들을 말을, 이상한 철학자는 혼자서 우기면서, 자신의 우물 속에 갇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