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여행기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0(빌바오(2))

이효범 2024. 5. 3. 04:50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0(빌바오(2))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0(빌바오(2))

 

구녕 이효범

 

모처럼 푹 잤다. 10시간을 넘게 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일기를 쓰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렇게 잘 작동하던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패스워드를 아무리 처넣어도 연결이 안 된다. 결국 다른 건물에 있는 안내 숙소까지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야 해결이 되었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아침 10부터 저녁 7시까지 연다. 길은 익히 알고 있고, 가까운 곳이라 천천히 이동했다.

 

예의 그 하늘로 높이 솟은 동상 앞에 오니, 경찰이 이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메인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 모양이다. 그런데 차단되는 도로가 꽤 길었다. 이번에는 강이 아니라, 중심 도로를 따라 계속 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속이 불편했다. 나이가 들면 신체의 신호를 참기 힘들다. 난감해졌다. 다행히 문을 연 카페가 보인다. 급히 들어갔는데, 남자 화장실 앞에 줄이 서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옆에 있는 빈 여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런데 잠겨진 문 벽에, 남자 화장실에서 보지 못했던, 웬 낙서가 그리 많은지.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궁금했다. 그냥 카페를 나오기가 미안해서, 이미 아침에 먹은 커피를 또 시켜서 마시고 있는데, 밖이 시끄럽다. 다양한 무리들이,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무슨 캐치프레이즈를 든 채, 구호를 목청 높이 외치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오늘이 노동자의 날이지. 바스크 지역의 천하 군중을 이 자리에서 다 보는 듯했다.

 

구겐하임 입장료는 벽에, 성인 18유로로 쓰여 있다. 그런데 계산서에는 9유로만 찍혀 나온다. 나는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등했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사우스 코리아이지. 또다시 몇 살이냐고 묻는다. 72살이나 늙었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들어가라고 한다. 참 이상한 여자이다. 일 층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홀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5cm 정도 두께의 붉은 철판으로, 3m 정도 높이의, 형체 여러 개를 쭉 전시하고 있다. 성처럼 곡선을 따라 들어가면 막힌 공간이 끝이다. 무엇이 있나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니 이게 애들 장난이지 미술품이야! 사람을 놀리는 것 같았다. 9유로만 받아서 그렇지, 18유로를 다 냈더라면 미술관 관장한테 가서 따지려고 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미술관 안에는 우리가 잘 아는 고호나 모내가 그린 걸작품들은 없었다. 대부분 내겐 생소했다.

 

어느새 2시간을 돌았다. 배가 고프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부르고스의 성당과 어떻게 다른가? 그곳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었다. 분위기는 엄숙하였고,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단 하나의 주제가 흐르지 않는다. 수많은 이야기가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관람객들은 끅끅거리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작품 앞에서 무엇인가 서로 논하기도 한다. 정적이 아니고 동적이다. 분위기는 엄숙하지 않고, 재미있어 한다. 이제 서양 중세처럼, 믿음을 기초로 하는 종교의 시대는 지났다. 성스러움을 찾지 않는 세속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내일 순례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202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