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여행기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7(산토 도밍고 데 라 같사다)

이효범 2024. 4. 30. 12:53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7(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7(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구녕 이효범

 

그림 같은 길을 5시간 동안 꿈속처럼 걸었다. 길은 평화롭고, 두드럽고,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축복이 가득하였다. 왼쪽으로는 높은 산에 눈이 쌓여 햇살에 더욱 희게 반짝거리고, 고원에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주위는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가난한 성자도 이 길을 걷는 동안은 아마 근심을 내려놓았으리라.

 

인가 없는 길을 감탄하며 두 시간을 완만하게 올랐다. 고개 위 쉼터에서 한 중년이 인사를 한다. “어젯밤 어르신이 같이 잔 저녁이 제 아들입니다라고 말한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한 청년과 잤다. 그는 두 번 이 길을 걸었고, 이번에는 결혼하기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걷는다고 했다. 요즘 세상 참으로 보기 드문 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가 더 건장했다. 큰 짐을 지고 먼저 와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 아들이 오고, 그다음에 어머니가 왔다. 가족이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알베르게에서 자면 비용도 얼마 들지 않는다. 경치를 둘러보며 하루 종일 걷고, 대화하고, 먹으면, 오히려 한국에서 사용하는 생활비보다 더 저렴할지 모른다. 스페인의 음식비는 생각보다 싸다. 20유로 이내로 전식, 본식, 후식이 나오는 제법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코스나 다른 코스를 여러 번 걷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언덕에 올라 조금 걸으니 시루에냐가 나오고, 골프장이 보인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 처음 보는 골프장이다. 주위는 인공적으로 별장 건물들과 체육시설들이 들어섰는데, 아직 시즌이 아니어서인지 매우 한가했다. 혼자서도 86유로면 칠 수 있다고 한다. 잘 가꾸어진 골프장인데 치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그 큰 드라이버 연습장에도 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시설이 아까웠다. 순례길에 골프를 친다는 것은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일 것이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있는 대성당은 리오하 지역에서 유일한 교회 요새가 된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스페인 르네상스 조각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제단 장식이 있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서성이다가 발길을 돌렸다. 산토 도밍고는 카미노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성인이다. 그는 본래 목동이었고, 11세기에,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빌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수사가 되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수도원에서 거절당했다. 그래서 숲속에 외딴집을 짓고 은둔자로 살았다. 그가 은거 생활을 한 곳이 바로 그의 이름을 딴 이 마을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콤포스텔라로 가려면 도밍고가 사는 집 근처를 지나야 했다. 도밍고는 순례자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은거하는 숲은 순례자들을 약탈하던 악당들이 숨기 좋은 곳이었다. 이 인근의 강을 건너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도밍고는 결국 순례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숲으로 지나가는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고 관리하며, 자기가 사는 집을 순례자들을 위한 오스피탈로 개조했다. 마침 알폰스 6세가 1076년 이곳을 지나가다 도밍고가 해놓은 일을 보았다. 알폰스 6세는 자신도 예전부터 카미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도밍고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땅을 하사했다.

 

이제 나는 순례길의 절반에 가까이 왔다. 다음 마을은 그라뇽인데, 여기를 지나면 순례길의 세번째 지방인 카스티아 이 레온이 나온다. 지금대로 계속 이 순례의 걸을 것인가? 오면서 나는 내가 걷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요한복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리라.”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천명하셨다. 기독교인들은 그 길을 걸어, 회개하고, 거듭나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 기독교가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는 도()에 대해 매우 친숙했다. 노자의 도덕경, 아예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로 시작된다. 노자가 자연의 無爲의 도를 말했다면 공자는 인간 간의 人倫을 설파하였다. 또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길을 말한다.

 

나는 길()은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길이 끊기면 고립되고, 고립되면 썩는다. 우리가 가끔 길에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으나, 그것은 새로운 길을 내거나, 아니면 길을 더 잘 가기 위해서 반성하기 위함이다. 결국 사람은 獨存하는 존재가 아니라 共存하는 존재이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길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 길은 결국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기 위함이다. 남을 약탈하고 남을 죽이기 위한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성인은 왜 이 길을 갔는가? 새로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왜 우리는 이 길을 가는가? 그 성인이 갔던 고통의 길을 경험함으로써,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길을 걷는 것은 하나의 다짐이고, 다짐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성스러움으로 가는 하나의 길일뿐이다. (2024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