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에 나타난 효사상 3
구녕 이효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그런데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다르다. 아버지의 사랑은 엄격하고 어머니의 사랑은 인자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것을 ‘엄부자모(嚴父慈母)’라고 부른다. 이 말은 중국 진대의 정사인『진서(晉書)』에 처음 보인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힘든 삶을 사셨다. 일제시대, 해방 전후의 혼란, 6.25,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점철된 눈물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과 자식을 지키기 위해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눈물을 안으로 삼키며 인고의 세월의 견뎌내셨다. 자신은 없고 오직 자식이 희망이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전문)
우리 아버지들은 사랑을 살갑게 표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우리는 아버지가 무섭기만 했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한없이 멀리 계시고 무관심한 분이셨다.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 때는 이미 아버지가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무거운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어두운 방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_ _.//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 ‘성탄제’ 전문)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父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식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 ‘아버지 등을 밀며’ 전문)
고인이 되신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길은 무엇일까? 맹자는 3가지 불효를 말했다. 부모를 불의에 빠트리는 것이 그 하나이고, 부모가 연로한데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것이 그 둘이고, 후손을 잇지 못하는 것이 그 셋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불효는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이다. 먼 조상으로부터 어렵고 귀하게 이어진 생명의 흐름을 자손만대에까지 전해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단절시키는 것은 조상의 은혜를 저버리는 불효막심한 행위다.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줄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 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이건청, ‘산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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