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부부관계에 대해서7)
구녕 이효범
젊을 때나 늙을 때나 결혼을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힘은 그래도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사랑은 느낌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가 개입한 결심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사랑에 갑자기 빠지거나 또는 사랑을 갑자기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결심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변함없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이 책임과 약속이 없는 결심은 헛된 것이다. 사랑을 결심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에게 주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때때로 사랑을 결심하고 결심한 사랑을 계속 간직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결심 속에 포함되는 개인적인 희생은 우리의 사랑이 참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성장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책임감 있는 결심을 한다는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인 노력과 정직성이 그 바탕이 된다. 우리 관계가 느낌보다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작은 실수를 해도 관계가 깨지지 않는다. 실수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결정에 좌우된다. 만약 우리가 자주 실수를 하면 우리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약해진다. 우리의 대인관계가 충분히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결심하는 능력을 키우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상대방과 우리의 느낌을 나누는 마음과 마음의 대화는 이런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효과적으로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무언(無言)의 표현이 있다. 그 중 중요한 하나가 만지는 것이다. 때로는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부드럽게 만지는 것 이외에 더 좋은 표현 방법은 없다. 우리는 상당히 무례하게 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상처를 치유하고 활력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만질 수도 있다. 표현하는 방법 중에 특별히 힘이 있는 방법은 만지는 것이다. 즉 만지는 것이 상대방이 나를 믿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보여준 신뢰감은 신성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상대방이 나타낸 신뢰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만약 만지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서약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선물인 상대방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고 그 행동 자체가 책임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이 보여준 믿음을 책임 있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상대방이 말로 나타내지 않은 마음에 대하여 더 민감해진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상대방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대화에 능숙해질 수 있다.
성 생활은 단순히 부부들이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니다. 성생활은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며, 그리고 서로 상대방에게 그들 자신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표현해준다. 성생활은 부부 사이에 이미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다. 성생활은 그들의 모든 사랑과 민감성과 부부 사이에 이전부터 나누어 온 그 모든 것을 집약시키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성생활의 성공의 척도는 그들이 서로 상대방한테 관심을 가지는 능력과 사랑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이 능력은 결혼식 후에 얻어지는 어떤 기술이 아니라, 결혼식 때 자신이 가지고 온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성생활은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간다. 이런 성생활은 ‘이것이 전부냐?’라는 질문으로 끝난다. 행위로서의 성생활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쓰는 인스턴트커피와 같다. 깊은 뜻을 전달하는 성생활은 육체적이고 순간적인 것을 떠나 영원한 것이 된다. 성생활은 부부가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을 가장 친밀하게 그리고 성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성행위로 두 사람은 하나로 결합된다. 이 성스러운 결합을 준비하기 위하여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 들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깊게 서로의 느낌을 나눈다.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자유를 간직하려면 우리 생활의 여러 분야로부터 오는 영향을 미리 알아야 한다. 사회는 친척, 친구들, 책, 그리고 보도기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입관과 일정한 태도를 가지도록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결혼이나 직업에 대해서도 성공의 기준을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돈을 얼마나 벌고 있는가, 출세하고 있는가’ 등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 기준에 따르면 결혼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이나 헌신을 둘째로 치게 된다. 현대사회는 여자나 남자에게 개인의 가치는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일에 성공한 정도와 일치한다고 교육시킨다. 불행하게도 이 교육으로 인하여 그들의 욕구나 대인관계는 이차적이 된다. 이런 사회제도를 극복하는 길은 대인관계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그것만이 현대사회에서 자유를 간직하는 길이다.
결혼 생활을 자기들만의 것으로만 생각하는 부부들이 있다. 그들은 결혼생활이 성공하지 못하면 두 사람만 고통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생활과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한테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결혼생활이 그렇게 자기들만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부부가 결정하는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관련된다. 자녀를 예로 들어 본다면, 자녀들은 여러 형태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런 말이 있다. “아들한테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그 아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길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녀들을 위하여 부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부부는 자녀들한테 결혼생활이 말할 수 없이 나쁜 것이라는 경험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이다. 한 부부가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그들의 관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로부터 나오는 진동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미를 전해준다.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반드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선물의 뜻으로 쓰는 물건이나 행동이 마음의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용서 없이는 두 사람이 멀어지기만 한다. 한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기억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할 것이다. 용서를 주고받고 싶으면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 상대방이 없으면 용서할 기회가 없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한테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용서를 청하지 못하게 하는 숨은 장애물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행동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상대방의 가치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을 잊어버릴 수 있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면 더 가깝게 접촉할 수 있다. 용서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검토와 자신의 잘못과 자기의 상한 마음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용서하는 것은 다시 두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상처받기 전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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