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이입과 행입
원효는 기신론에서 인간이 그 마음을 지혜롭게 간직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좋지 않은 행위(악업惡業)들을 일곱 가지로 말한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은 몸으로 잘못하는 행위(신악업身惡業)이고,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기어綺語는 입으로 잘못하는 행위(구악업口惡業)이다. 이것은 사실 예전부터 내려오는 불교 계율이 기본적으로 경계한 악업들이다. 여기에 탐貪, 진瞋, 치癡(의악업意惡業)를 첨가하여, 그 다른 악업들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교 계율의 골격이었다. 이것이 십악업十惡業이고, 이 십악업을 안 하는 것이 십선업十善業이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기신론은 이것을 아비다르마 부파 불교部派佛敎의 이론을 흡수하여 악업의 단계를 정하고, 말과 행동으로 범하는 위의 일곱 가지를 가장 고약한 단계의 악업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아직 행위로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중에 감추어진 그 전 단계의 악업으로 탐貪, 진瞋, 치癡, 만慢, 의疑, 견見이라는 6가지를 나열했다. 이것은 원시 불교 때의 소박한 윤리관이 다소 더 복잡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신론과 원효는 이 6가지 마음가짐의 악업이, 한층 더 깊은 마음의 심층에 숨어있는 잘못된 자아의식(我執)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것은 한 단계 더 앞선 마음의 악업이다. 이것을 통틀어 ‘의意’(Manas)라고 부른다. 이 자아의식에는 네 가지 측면이 있다. 즉 ‘나’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我癡), ‘나’를 모르면서도 ‘나’를 무조건 애지중지하는 것(我愛), ‘나’의 정체를 모르고 ‘나’에 대한 자만自慢을 갖는 것(我慢), ‘나’ 아닌 ‘나’를 고집하는 것(我見)이 그것이다. 이것은 원시 불교에서 ‘아집我執’이라고 소박하게 말했던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기신론은 이 그릇된 아집이 생기는 심적 과정을 삼세三細(세 가지 미세한 모습)와 육추六麤(여섯 가지 거친 모습)로 설명한다. 삼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업식業識), 능견상能見相(전식轉識), 경계상境界相(현식現識)을 말한다. 여기서 상相은 발생했다 사라지는 현상의 구조와 형상을 의미한다. 아집이 생기는 첫 번째 근본 원인은 무명업상 때문이다. 능견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무슨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행위이고, 경계는 그렇게 할 때 눈앞에 나타나는 객관적 대상이다. 즉 생각하는 것이 능견이고 생각되어진 그 무엇이 경계이다. 우리 마음의 제8식(아알라야식)에서 이러한 주관과 객관이 대치 분열되면 제7식(마나스식)이 발동하고, 이것은 다른 6식과 함께 작동하면서 삼세 다음의 생멸의 거친 상인 육추가 나타난다.
육추의 첫째 상은 객관적인 대상인 경계에 대한 분별이 생기는 모습이다(지상智相). 분별을 통해 사람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가린다. 이 분별하는 마음이 계속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상속상相續相이라고 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잘못 내려진 분별의 태도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나,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 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지려고 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제하려고 하는 강한 집념이 나타난다(집취상執取相). 이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자기 마음을 바로잡아 그 마음의 잘못을 고치는 노력 없이 그대로 방임하거나, 다른 한편 더 나아가 고약한 무명의 충동이 부채질하게 되면 일은 심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제와는 다른 어떤 허황한 망상을 그리며, 그것을 실제인 양 착각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계명자상計名字相). 그러다가는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만다(기업상起業相). 이렇게 해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저지른 일에 얽매어 고통을 당하게 된다(업계고상業繫苦相). 이렇게 사람은 무명에서부터 생멸의 과정을 통해 타락해 간다.
기신론은 이러한 과정 전체를 인간 심성의 타락 과정이라고 보고, 이 4단계를 그 근본에서부터 각각 생상生相, 주상住相, 이상異相, 멸상滅相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진여한 일심이 그 통일성, 동질성, 완전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개아 의식個我意識이 생겨, 한동안 주住하다가, 한층 더 변이變異하고, 마침내는 완전히 그 일심으로부터 본래적 모습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생상生相(무명업식→전식→현식)→주상住相(자아의식)→이상異相(탐, 진, 치, 만, 의, 견)→상멸相滅(살생, 투도, 사음, 망어, 악구, 양설, 기어)이다. 원효는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의 심성이 이와 같은 변화 과정을 거친다고 분석한다.
원효는 생, 주, 이, 멸하는 중생심의 타락적 경향에 대처해서 이를 치유하는 여러 덕목을 제시한다. 우선 6바라밀 또는 10바라밀(시施, 계戒, 인忍, 근勤, 정定, 혜慧 +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가운데 보시, 지계, 인욕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사섭四攝(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중의 보시(베풀어 주는 것), 애어(좋은 말 하는 것), 이행(상대에게 이익되는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효는 또한 팔정도 중의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과 그리고 삼학三學(계戒, 정定, 혜慧) 중의 계 및 십선업 중의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악구, 불양설, 불기어 등 이 모든 덕목들은 모조리 멸상滅相에 대처해서, 살생 등 일곱 가지 악업들을 없애는 덕목들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원효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금지적 조항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원효는 그것들을 적극적인 참여인 이타利他의 행위로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원효는 단순히 악행을 금지하거나 선행을 권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행위의 기반인 마음가짐에 보다 많은 역점을 두고 있다. 그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 팔정도 중의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근正勤이고, 삼학 중의 정定, 혜慧이고, 육바라밀 중의 근勤, 정定, 혜慧이고, 그리고 이입二入 중의 이입理入이고, 사무량심四無量心등이다. 초기 불교 당시부터 강조되어 온 사섭과 사무량심은 원효에게 크게 공감을 일으킨 교훈이었다. 사무량심은 자慈(한량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비悲(한량없는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喜(한량없는 중생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하는 마음), 사捨(한량없는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를 말한다. 이런 마음이 있는 곳에는 불행도 고통도 없다. 이런 덕목들은 마음의 정화, 즉 이상異相과 주상住相과 생상生相을 없애기 위한 실천적 교훈들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에서 보살의 길로,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라는 이입二入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입理入이란 ‘순리신해順理信解’(이理에 따라 공손히 그것을 믿고 이해하게 되는 일)는 했으나, 아직 행을 증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이 말에서 적어도 ‘순리신해’를 보살이 되는 전제 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이입理入의 첫 단계가 십신十信이다. 그것은 중생이라는 존재들이 진성眞性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 진성이 각각 다른 그 무엇이 아니고, 또 그 진성이 어떤 공유물도 아니고, 다만 객진客塵(외계에 대한 번뇌 망상)에 의해 가려져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깊게 믿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들로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이 있다.
십주는 중생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다시 미혹되는 흔들리는 마음이 없이, 그 공空이라는 깨달은 관점에 머물러, 그 마음가짐을 동요케 하지 않고, 그 마음의 불성을 고요히 드러내는 단계이다. 십행은 자칫하면 불성을 하나의 법상法相으로 볼 우려가 있으므로, 법공法空의 도리에 의거하여, 불성은 어떤 객관적 실재가 아니지만 또 허무도 아님을 체관諦觀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십회향十廻向은 이미 자기도 없고 타인도 없으며(자타무별自他無別),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는(범성불이凡聖不二) 평등한 경지에 서 있는 단계이다. 바로 이 십회향의 단계는 마음가짐이 금강과 같이 견고하고, 물러섬이 없는 경지이며, 적정무위寂靜無爲하고, 분별을 일삼지 않는 경계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생긴 후에, 보살은 행입行入인 십지十地에서 증입證入하는 행을 하게 된다. 그 행입은 크게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에 드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여이如理한 지혜로운 마음은 어떤 객관적인 대상이나 환경 속에서도 얽히고 끌려 다니는 일이 없으므로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거나 끌려가는 일이 없고, 또 여이如理한 경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온갖 형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말하자면 그림자가 따라다니며 변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온갖 종류의 세간의 복락福樂이나, 또는 이른바 출세간의 복락인 보리나 열반 같은 것에 대하여 안타까히 그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 이것저것을 선택하는 일 없이 평등한 경지에 통달하니 외계의 유혹에 동요됨이 없다.
(…) 이윽고 타인으로 하여금 역시 이 같은 행에 들어가게 한다.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의 공함을 알기 때문에 능히 두루 모든 중생을 구하고 제도濟度한다. 무슨 인위적, 고의적인 의도를 갖고 일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에 따른 무슨 형상도 안 생기지만 그렇다고 적멸이란 허무, 또는 무능력의 경지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앞에 말한 것이 자리행이고, 뒤에 말하는 것이 이타행이다.
■더 읽을거리
▪김영미, ?신라불교사상사연구?, 1994, 민족사.
▪김형효, ?원효에서 다산까지?, 2000, 청계.
▪김형효 외, ?원효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은정희 역주,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1991, 일지사.
▪이기영, ?원효사상?1, 홍법원, 1967.
▪―――, ?한국의 불교사상?, 삼성출판사, 1981.
▪―――, ?한국불교연구?, 한국불교연구원, 1982.
▪최유진, ?원효사상연구-화쟁을 중심으로?, 1998, 경남대출판부.
▪예문동양사상연구원, ?원효?, 2002, 예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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