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6, 12월)
o 12월
구녕 이효범
아버지 고무신보다 검은 어둠이 내립니다.
낡은 구두를 신고 당신은 혼자 걸어갑니다.
유리 같은 하늘에는 새의 흔적마저 끊어졌는데
모자도 안 쓰고 당신은 강을 따라 계속 내려갑니다.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귀를 때리고 눈을 가로 막아도
고개 숙인 당신은 얼음장 밑 강물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그렇게 오랫동안 싸움하고 있나요.
상처를 주는 것은 언제나 인간입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가 우리의 푸른 심장을 파괴하죠.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사람도 상처가 깊은 사람입니다.
지난날 잘못들을 주어 담을 수 없다고 해도
낙엽 지듯 존재 밖으로는 걸어 나가지 마세요.
12월은 달력처럼 찢어서 던져버릴 수 있는 종말이 아닙니다.
황금빛 진리를 위해 의심되는 모든 껍데기는 날려 보냅시다.
그러나 바닥에, 그 바닥 밑의 더 컴컴한 바닥에, 절망 같은 희망이 남아있는 한
돌아갑시다, 우리 따뜻한 언어의 집으로.
후기:
12월이다. 참으로 착잡하다. 올 해는 38년을 다닌 직장을 퇴직했다. 한 생애를 정리하고 다음 생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난 삶은 후회스럽고 다가올 삶은 아직 알 수 없다. 지난 생애를 정리하면서 가장 안타가운 점은 인간관계에서 온다. 세상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참기 힘들다. 공자에 의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呼)” 라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도 군자가 되기는 멀었는가 보다.
그러나 돌이켜 반성해보면 나 또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인생에 가장 가까운 반려자인 아내와도 살가운 날들보다는 긴장하는 날들이 많았다. 내가 난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이다. 기대만큼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속상하다. 그런데도 내가 해줄 일이 없다. 아니 해줄 것은 많지만 자식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며 뒷짐을 지고 방관한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섭섭하고 서운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 하겠는가.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버릇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또 바꾸기도 어려운 데 말이다. 인간관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확장된다. 그런 관계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마주치는 동식물이나 자연들에게 좀 더 성실하고, 더 많이 배려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2월, 어쩔 수 없이 몸을 떨면서 하나의 매듭을 지어야한다. 지나간 일들은 잡지 못하는 흘러간 강물과 같다. 다가올 다음을 다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12월은 자신과 남에게 조금은 관대할 필요가 있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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