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4)
구녕, 이효범
어제는 제자들이 정년퇴임식을 해주었습니다. 김영란법 때문에 학교에서는 스승의 날 행사도 폐지되는데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 하나 제자들에게 잘해준 것도 없는데 뻔뻔한 얼굴로 나가려니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몸이 긴장하는지 자꾸만 목이 말랐습니다. 식은 예전에 유성 국군휴양소 자리에 있는 계룡스파텔이었습니다. 150명쯤 되는 우리 제자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81학번 1회 졸업생부터 현재 재학생까지 우리과의 역사를 한 눈에 보는 것 같았습니다. 먼 옛날 제자들은 교장을 하고 있고, 일부는 벌써 퇴직하여 자기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주말인데도 인천, 순천 등 먼 곳에서 왔다 가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연으로 특히 기억나는 제자가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서운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나는 강의실의 마지막 수업도 아니고, 이런 의례적인 퇴임식에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지난 시절을 회고해보았습니다. 극히 개인사이지만 편지에 올려봅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영광스런 자리를 만들어준 우리 제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시간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거꾸로 흐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 때는 일 년에 한 번 운동장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웅변대회가 열렸습니다. 꽃 같은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나를 웅변대회에 나갈 반 대표로 선정하셨습니다.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나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원고를 외우고 목청을 높이 가다듬으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것이 어찌된 영문입니까? 단상에 오르니 1800여명의 학생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쏠리는데 나는 순간 그 시선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모든 원고 내용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아찔함을 너무 일찍 경험하였고 그것은 평생 나의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내가 교단에서 일생을 보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는 출가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선배의 꼬심에 넘어가 대전 효동 심광사에 있는 대전불교학생회에 나갔는데, 그곳 주지 수님은 大義 큰 스님으로 한국선학원 이사장을 지내셨고, 그 때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靑潭스님과 친한 사이여서, 거물급 스님들이 그 절에 많이 다녀가셨습니다. 그중에 청담스님과 교분이 있던 白峰거사님이 계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그 분은 나이가 늦어 불교에 입문하여 스님이 되지는 못했고, 지금의 충남대학 근처 죽동의 한 민가에서 불교를 가르쳤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학교 보충수업은 안 받고, 쌀 한말을 짊어지고 그곳에 가서 참선을 하였습니다. 그 때 내가 받는 화두가 ‘萬法歸一 一歸何處’였습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돌아간 하나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수덕사의 만공 큰스님도 이 화두로 깨달았던, 그런 공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이었는지 아니면 구도심이 부족해서 인지 나는 출가도 못하고, 온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서의 경제적 가난이 나를 오늘의 나로 키웠습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다음 학기에 등록을 할 수도 없었고 가정교사나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면 서울에서 생활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신히 대학을 마치고 서울 망우리에 있는 혜원여자 중학교의 강사와 성남에 있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을 마쳤습니다. 대학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나는 가족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은사님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철학과에 들렸습니다. 학과장님만 나와 계셨습니다. 그런데 학과장실에는 다른 대학 교수님이 와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놀라면서 이런 졸업식 날 학과 사무실을 찾는 학생은 처음 본다면서,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며칠 전에 지방에 있는 공주사대의 이구재 교수님으로부터 본인에게 전임으로 올 수 있겠느냐는 의뢰가 왔는데, 자기는 서울교대에 전임으로 있으니까 대신 나를 추천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 그 때 학과장이셨던 안종운 교수님도 찾아뵙고, 나는 꿈도 한 번 꾸지 않은 공주사대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두 분 모두 지상에 안계시지만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또 잘 모시지 못한 미안함을 표합니다. 안종운 교수님은 그야말로 대쪽 같은 대표적인 충청도 선비셨고, 이구재 교수님은 전형적인 영국 신사셨습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명예 퇴직한 박석인 교수님도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1982년 29살로 공주사대 전임강사가 되었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이런 영광되고 과분한 직책을 얻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공주에 공주사범대학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전임이 되고 나서 낯선 공주와의 인연을 더듬어보니 불연 듯 고등학교 때의 불교학생회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우리 학생회는 매달 한 번씩 옛날 충남 도청 뒤편에 있는 충렬탑을 청소하였고, 여름과 겨울에 수련대회를 가졌습니다. 처음 맞는 여름 수련대회를 공주 갑사에서 했습니다. 한참 꿈꾸는 시절 갑사에서의 수행정진은 내 생애에 아주 값진 추억이 되었습니다. 수련대회 도중 하루는 계룡산 연천봉에 올랐다가 남쪽에 있는 신원사를 돌아 다시 서쪽에 있는 갑사로 오는 수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요. 신원사에 오니 분명 처음 오는 사찰인데도 너무나 낯익어, 나는 아예 전생에 이곳에서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안온하고 멋진 풍경에 빠져 언젠가는 이곳에 와서 살리라 다짐을 마음속으로 깊이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대학을 서울로 올라간 이후로 나는 그 일을 아주 깡그리 잊었습니다. 아마 그 신원사에서의 다짐과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순수하게 한 일이었던, 그 충렬탑에서의 자원봉사 덕분에 나는 공주와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8월말이면 나는 정년퇴임을 맞게 됩니다. 37년 6개월을 봉직한 셈이 됩니다. 아하, 강산도 3번이나 변한 오랜 시간입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하루 밤 꿈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친구는 30년 넘게 한 번도 이전하지 않은 내 연구실을 보고 아연 실색을 했지만 나는 5평도 안 되는 연구 공간을 한 번도 답답해하지 않고 마치 무한한 우주인 냥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황제가 되어 아무 거침없이 제멋대로 철학도 하고, 시도 쓰고, 잠도 자고, 술도 마셨습니다. 물론 후회가 많이 남지요.
사실 긴 대학 생활에서 후회할 일이라면 100가지도 넘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보직을 너무 많이 맡았다는 것입니다. 행정 능력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계속되는 학교 일로 정신이 분산되다 보니 통으로 시간을 내어 집중적으로 철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랑할 만한 서적도 내지 못했고, 누가 무어라고 해도 입에 거품을 품고 이것만은 내 생각이라고 주장할 이론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수업에 치열하게 철저를 기하지 못했다는 것, 그 다음은 우리 제자들하고 사적으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학교 일로 회의장에서 보낸 그 건조한 시간들을 우리 제자들과 강의실에서 벗어나 매일 노을 지는 석양을 보면서, 공산성을 돌아 공주성당과 박물관 그리고 황새바위와 곰나루를 거닐면서, 인생과 자연과 정치와 철학과 미래를 논했다면, 말년의 洙泗江 가의 孔子처럼 금강학파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참으로 지나간 날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대학생활은 후회만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선 우리 제자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양보하겠다는 학생도 있었고, 지금도 꼬박꼬박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기탁하는 졸업생도 있습니다. 또 중등학교 일선에서 평교사와 책임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많은 제자들을 보면 오히려 내가 부끄럽습니다. 우리 과를 졸업하고 아쉽게도 교단에 서지 못한 제자들도 많습니다. 그들도 자기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디 모두 성공하기 바랍니다.
나는 이 대학에 부임할 때는 적자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도 얻었고, 두 딸과 늦둥이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두 딸은 모두 결혼하여 두 사위와 외손녀, 외손자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비록 아내의 것이지만 세종시에 아파트도 있고, 아내 몰래 내 비밀통장에는 현금도 제법 두둑하게 쌓였습니다. 여러분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술과 커피는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여러분의 모교는 예산농전, 공주문화대학, 천한공전과 통합하여 커다란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처음 통합할 때에는 학교 진로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조그만 규모이지만 공주사범대학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능으로 정체성을 지켜가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판단이나 집단의 결정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특이나 우리나라같이 4대강국이 만나고 위기와 기회가 중첩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결정적인 판단 미스는 우리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제자들이 참으로 어려운 결단의 순간에는, 크고 멀리 바라보면서 더 많은 自由가 주어지는 쪽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眞, 善, 美라는 모든 가치의 창조는 자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북한처럼 자유가 없는 곳은 커다란 집단 감옥입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즉시 먹고 싸는 일이 전부인 동물로 전락합니다.
다음으로 나는 우리 제자들이 자유 속에서 자신의 타고 난 능력을 발휘하는데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은 平等하다는 신념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평등하다는 주장은 사실 기성 고등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지만 특히 우리 민족은 그것을 ‘人乃天’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더욱더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생명체는 나와 무관한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언뜻 보면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충적인 가치처럼 보이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본질적으로는 강하게 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등은 책임 있는 자유이고, 자유는 존중하는 평등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우리 제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包容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포용은 개인적으로는 영혼을 더 높이 끌어올리고 존재의 깊은 근원과 만나는 길입니다. 또한 포용은 과거로 퇴보하는 패배의 길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승리의 길입니다. 헤겔은 ‘없애 높혀 가진다’는 변증법을 말하고, 元曉는 10가지 극단을 해결하는 和諍을 논합니다. 우리는 모순을 극복하고 다양한 꽃이 조화롭게 피어나는 화엄의 세계로 가야만 합니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에 물고기가 많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일본은 우리의 앞마당이고 북한과 만주는 우리 뒤에 위치한 소중한 숲입니다. 우리는 고대 이탈리아의 로마를 현대 한반도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반도는 지나가는 다리가 아닙니다. 새로운 문명의 축입니다. 이제 유럽과 미국을 지난 문명의 축이 극동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호시기에 가까운 지역끼리 부딪쳤던 오래된 증오의 감정으로 되돌아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어둠의 길로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만 선이고 이웃은 모두 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새로운 발전에는 이질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유전적으로 근친상간하는 것이 열성적인 질병을 드러내듯이, 자기 패거리하고만 뭉쳐 다니는 것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사랑하고, 심판자가 되어 시퍼렇게 타인을 응징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과 협력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기존의 질서가 깨어져 일시적으로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보여도, 이것만이 지속가능한 성공의 방식인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은퇴합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공주대학에서 일체 강의를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건강이 허락되면 한 2,3년 동안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계를 내 집 삼아 떠돌아다닐 셈입니다. 혼자도 좋고 아내가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요. 그 다음에는 지금 장만한 세종 에비뉴 힐 6122호에 있는 이효범연구소에 틀어박혀, 죽음에 관한 철학책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인간론도 다시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가끔 시도 쓰면서 지낼 생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참선에 더욱 몰두하여 아직까지 완전히 풀지 못한 고등학교 때의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확연히 깨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미 쓰기 시작한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글도 계속 보내고, 보내는 대상도 점점 확대해나갈 예정입니다. 참 얼마 전에 나는 ‘오래된 오늘’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이 자리에 가지고 나오지는 못했지만, 갖기를 원하는 졸업생은 내게 주소를 적어주면, 일주일내에 부쳐 보내겠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사람이 하나의 직업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직업병이 생깁니다. 사범대학에 오래 있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꼰대가 되었습니다. 내 눈에 들어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끌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우리 제자들이여 퇴역하는 늙은 교수를 부디 용서하시고, 새로운 문명이 열리는 이 가능성의 시대에 모두에게 무한한 영광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공주사대 윤리교육과 만세! 우리 공주사대 윤리교육과 제자들 만만세!
감사합니다.
2019년 8월 17일 이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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