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3)
구녕, 이효범
더위가 절정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니 얼굴이 땀으로 범벅입니다. 우리의 정치 지형은 150년 전 구한말로 돌아간 듯싶고 날씨마저 폭력스러우니, 여름이 다 그렇지, 세상이 어디 편할 날이 있었나 하다가도 마음은 아주 심란합니다. 공직에서 떠나니 이제 좀 게으르게 살아야지 각오를 다지지만, 정년퇴직 후에 정장을 차려 입고 자기 집 2층으로 출근했다는 어떤 선배처럼 다시 잠은 오지 않고 옛날 버릇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세종은 외적 발전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여러 문화모임들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동기 김백겸과 이은봉시인이 주축이 된 시모임도 비상의 자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수줍음 많은 나는 아직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얼마 전에 <세종시마무> 2호를 펴냈습니다. 여기에 이 고장 출신의 최승자 시인이 소개되었습니다.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는 1981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이 시대의 사랑』이라는 시집에 나온 ‘일찌기 나는’입니다. 70년대의 암울한 유신시대에 학생운동 하다가 제적된 시인이라고 해도 이 시는 내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황진이부터 현대 여류 시인들의 시의 흐름으로 볼 때 아니 잘은 모르지만 우리 전체 시단의 역사 속에서 최승자의 다른 시들도 내겐 너무나 생경하고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절망적이고 너무나 폐허적이고 너무나 극단적이었습니다.
서양의 근대만 해도 존재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에는 동일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만일 A와 B, 두 개의 것들이 진정으로 동일하다면, 그 하나는 필요 없는, 잉여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잉여물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들은 충분히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들이며, 무한한 가능적인 세계(possible world)에서 존재하는 세계는 그만큼 더 완전하고 더 가치 있는 세계가 됩니다. 아무리 내가 못 생기고 지능이 떨어져도 나는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현대에 와서 뒤집힙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기는 ‘거꾸로 된 활자’, ‘줄 밖에 난 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활자는 오히려 독자의 눈을 어지럽혀 뽑아내야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뮈는 오래 전에 이미 『이방인』이라는 책에서 뫼르소라는 현대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가 죽지만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 뫼르소는 단지 태양빛이 강렬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카뮈에게 세계는 부조리하고 인간은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다시 떨어질 바위를 언덕에 올리고 있습니다. 카뮈와 절친이었던 싸르트르도 부조리를 말합니다. 그는 정신을 가진 인간은 對自(pour-soi) 존재이고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은 모두 卽自(en-soi)존재라고 구별합니다. 즉자는 존재와 합일된 즉 자기인데 반해 인간만이 세계나 자신에 대하여 거리를 가지고 바라보며, 그것과 자신을 구별하며, 그것에서 떨어져 자유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는 즉자가 가지고 있는 충만성이 없고 늘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불만의 고통으로 대자는 한편으로 바위처럼 즉자가 되고 싶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대자로 남아 자유를 향유하려고 합니다. 이런 욕구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조리인 것입니다. 또 인간은 타자에 대해 자유를 가진 주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를 즉자인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타자도 나를 즉자로 전락시켜 나의 주인에 되고자 합니다. 서로는 시선으로 서로를 제압하려고 싸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르트르에게 타자는 지옥일 뿐입니다. 인간은 토마스 홉스처럼 사회적 동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허무로 보는 생각은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사투를 벌이면서 끌고 온 것은 결국 머리와 뼈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믿는 것도 사실 뼈다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미 니체는 19세기 말 서양문명에 허무주의(니힐리즘)가 도래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서양문명의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거대한 서양의 현대 문명과 이 땅의 최승자 시인이 바닥에서 서로 연결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거창해졌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는 외손녀, 외손자가 밀고 들어와 일주일째 무단 점령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딸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 밤에 알라딘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귀신같이 2살 된 외손자 녀석이 깨어나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노구를 이끌고 가서 아이를 정성스레 안고 일어나 거실을 조용히 걸었습니다. 다행이 30분 만에 아이는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피도 끓지 않는 할아버지의 찬 가슴을 믿어준 아이가 참으로 고마워졌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 든 우리들은 손자, 손녀, 그리고 이어서 가문의 우리 아이들이 쭉 전쟁 없이 평화롭게 잘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가 가난해지고 결국 주권을 잃게 되면 우리는 다시 황현黃炫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구한말 경술국치를 당하여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하였습니다. 그는 종사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고, 특히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여기지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습니다. 그는 절명시絶命詩에서 지식인의 책임을 괴로워했습니다. "새와 짐승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망했구나,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천고의 역사를 되돌아보니, 사람으로 글자 아는 사람 되기가 이토록 어렵구나(烏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벼슬도 안 하고 시골에 묻혀 살던 선비에게 나라가 망한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고 죽음으로 자신의 삶이 욕되지 않았음을 보인 것입니다.
이제 세종은 우리 민족과 국가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결정되는 국가 정책은 우리와 우리 자손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이 고장에서 한 때 세계를 힘으로 지배했지만 사라져 가는 서구 문명의 종말의 정신과 슬프게 연결된 최승자 같은 비탄의 시인도 탄생했지만, 오늘의 시대는 황현 같은 굳센 의지와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머리는 무겁고 오늘도 날씨는 대단할 것 같습니다. 나는 시인을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플라톤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손녀, 손자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2019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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