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65, 나의 하느님)

이효범 2021. 4. 15. 07:18

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65, 나의 하느님)

 

o 나의 하느님

 

구녕 이효범

 

하느님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은 한국전쟁 후 따뜻한 봄날에 오서산 기슭에 오셨습니다.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는 없는 하느님

당신은 틈틈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성을 알기 시작한 눈 오는 겨울

예쁜 계집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트럭 꽁무니에 매달렸을 때

당신은 코너에서 굴러 떨어지는 나를 안았습니다.

대전에 있는 명문 중학교 합격자 발표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의 입을 비틀어

내 이름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가난이 어머니를 괴롭히던 사춘기 시절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돈벌러 가기 위해 제주도로 도망갔을 때

당신은 순경에게 고자질을 하였습니다.

또 출가한다고 스페인 투우처럼 겁 없이 돌진할 때

수덕사 여스님을 시켜 나를 절망시켰습니다.

학문은 건조하고 폐는 망가져 홀로 뒤에 남겨졌을 때

당신은 나를 강으로 조용히 불렀습니다.

강물은 밤에도 낮게 아주 낮게 흘러 바다에 이릅니다.

긴 공부가 끝나는 날 서방 박사를 보내

공주로 가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길은 넓고 평탄하였습니다.

길거리에 많은 여인이 나와 반겨주었습니다.

당신은 그중 가장 낙타를 닮은 사람을 뽑아

멀리 나와 동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자주 술잔을 들었으나

술잔이 넘쳐흐르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주셨습니다.

이제 연극은 끝나가고 목소리는 가늘어졌습니다.

관객은 벌써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들 가슴을 뻥하게 뚫는 명대사 한 마디도 나는 던지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는 아직도 당신이 그날 왜 오서산에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하늘에 오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강둑에 앉아 온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후기:

은밀한 개인의 역사를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떨어지면 죽는 아찔한 곡마단 외줄 밧줄을 타고 흔들거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경험은 이제 과장되고 미화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감사드리고 싶은 나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