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나오자마자 조산원은 즉시 나를 품에 안았고, 돌아서서 타월로 한 번 더 감싸 안은 다음 허둥지둥 옆방으로 데려갔다. 분만실에는 엄마와 조산원, 엄마를 지키던 아빠, 회진을 돌던 의사 선생님, 간호사가 있었다. 순식간에 일은 진행되었다. 방문객들은 밖으로 쫓겨났고, 아빠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엄마는 혼자 분만실에 남겨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8년 9월 28일 오전 8시, 처음으로 햇살을 본 날. 내가 보통 아기들과 다르게, 이른바 기형아로 태어나리라고는 누구하나 상상하지 못했다. 임산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물론, 모자보건센터의 일반적인 검사 방법으로 태아진단이나 초음파가 사용되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 이상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를 낳는 일은 나의 엄마, 안나에게는 매우 낯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9월 26일 오후, 양수가 터졌고, 옌세핑구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군사 훈련 중이던 아빠 로루프가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 달려왔고, 그제서야 엄마는 안심했다. 진통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하루 밤, 하루 낮, 또 하루 밤 --- 힘겨운 34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키 48cm, 몸무게 2.4kg, 팔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양어깨, 마땅히 팔이 달려있어야 할 곳에는 작은 돌기가 있을 뿐, 오른 쪽 다리는 정상이었지만, 왼쪽 다리는 줄어든 것처럼 오른쪽 다리의 반 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왼발조차도 발끝이 정강이에 닿을 정도로 몹시 휘어져 있으니 --- 막 태어났을 때는 얼굴이 새파랬다. 몸안에도 결함이 있을지 몰랐다.
죽을 지 살 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료현장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렇게 때문에 나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부모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다. 내가 첫 아이였기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진행 순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내가 다른 방으로, 그리고 아빠가 대기실로 가게 된 것은 당연한 절차라고 엄마는 생각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의사가 와서, 분만 후의 상태와 나의 핸디캡에 대해 대기실에 있던 아빠에게 먼저, 그리고 나중에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게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진정제를 권했다. 몸 안에 이상이 있는 지 없는 지 모르는 현 상태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만일 살아난다고 해도 이 정도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라면 시설에 맡길 수도 있다고, 둘에게 설명했다.
부모님은 심각하고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의사는 말했다.
“부모님들께서 직접 돌보시겠다면 최소한 20년이라는 세월을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출산으로 지치고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한 주사로 몽롱했던 엄마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가 방에 들어와 다시 한 번 설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는 사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직 엄마, 아빠 둘 다 나를 못 본 상태였다. 답답하고 무거운 3일간이 흘렀다. 친척들에게 전할 기쁜 소식은 슬픈 소식으로 바뀌었고 아빠는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브릿다 숙모가 병원에 와서, 엄마 침대 머리맡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살 수 있을까?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부모님은 모두 미션 교단 소속으로 교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셨고 신앙도 두터웠다. 그렇지만 이 사태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그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 자신의 침대 옆에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님께 물어보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신 것 같다.
부모님은 서로를 위로했다. 며칠이 지나 후 엄마는 내가 옮겨진 병동에서 모유를 먹을 수 있게끔 펌프를 사용해서 젖을 짰다. 이것은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젖을 먹었다. 그리고, 그리고 --- 체내의 기관들이 드디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둘은 3일 후에야, 나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산후 약해져 있는 엄마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의 긴 지하도를 건너서 내가 있는 병동으로 왔다. 조금은 둘 다 신경이 날카로웠다. 의사의 설명만으로는 실제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창을 통해 나를 봤다. 나 - 체중 2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 작은 레나 요한슨은 침대 위에서 입을 삐죽 내민 채 웃고 있었고, 건강하게 보였다. 귀엽다! 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귀여웠다.
부모님은 분명히 그 때, 나를 키우리라 결심하신 것 같다. 나와 같은 장애가 있는 경우, 부모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설에 맡길 것을 권유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정도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는 아기를 집에서 키우기 위해서는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둘 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두 팔이 없어도,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다.”
아빠의 이 한 마디는 결정적이었다.
(레나 마리아 클링밸(Lena Maria Klingvall),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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