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39, 가을 산행)

이효범 2020. 9. 24. 21:03

 

 

o 가을 산행

 

구녕 이효범

 

수척해진 나무에 마음이 수척해지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계곡물에 흐르는 붉은 낙엽을 보고 사랑하던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수줍게 빛나는 들국화에 코를 대보거나 나지막이 흥얼거리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바위에 않아 땀을 닦으며 바람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산정에 올라 높아가는 파란 하늘에 기도하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과 눈웃음을 주고받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코로나로 텅 빈 세상, 마지막 하나 열려있는 가게에 들려 동동주를 마시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술로도 산과 하나 되지 못하면 진정한 산 사람이 아니다. 비뚤비뚤 풀어진 발걸음으로 산을 나오면서 고맙다, 다시 오겠다, 되돌아 고개 숙이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니다.

 

후기:

우리나라는 도 경계지역에 큰 산들이 둘러쳐져 있어 사람들의 이동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북의 괴산과 경북의 문경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산세가 험난하여 아름다운 계곡들이 연달아 형성되었습니다. 화양계곡, 선유계곡, 쌍곡계곡, 용추계곡이 이 지역에서 유명합니다. 참으로 청정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풍광을 자랑합니다.

이번에는 대야산 품속에 있는 문경의 용추계곡을 산행하였습니다. 서서히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평일 오후인데다 코로나로 계곡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계곡 주차장에서 조그만 언덕을 넘으니 본격적인 용추계곡이 시작되었습니다. 물이 흐르는 계곡 바닥은 고운 여자의 피부 같은 매력을 지닌 거대한 통 바위들로 이어졌습니다. 숨을 죽이며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용추폭포가 나왔습니다. 거대한 바위틈으로 물이 낙하하여 두 개의 시파란 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무어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관이었습니다.

몇 만 년을 끊임없이 흘러 無爲의 연약한 물은 이런 자연의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온 계곡의 비경 중에 비경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물은 지형에 따라 어떤 때는 넓게 느리게 흐르다가 또 어떤 때는 좁게 가파르게 흐릅니다. 흘러가는 물 위에 붉은 낙엽이 하나 떨어져 흘러갑니다. 장장의 시간의 흐름 속에 잠깐 들어온 나의 모습인 것 같았습니다.

가을은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젖게 합니다. 텅 빈 계곡은 무한한 우주로 연결되는 통로 같습니다. 이 공허한 공간을 투명한 물은 아랑곳 하지 않고 쉼 없이 흘러갑니다. 깊고 멋진 계곡 의 무심한 물가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오래 울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