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늙어감에 대하여 4

이효범 2023. 5. 23. 08:14

4. 늙어감에 대하여 4

 

구녕 이효범

 

사회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정신적인 성장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근대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충족이유율이라는 하나의 사유(존재)법칙으로 정리했다. “충분한 이유 없이 그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즉 모든 상황에는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에는 쓸데없는 잉여물이 발생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은 절대 부조리하거나 허무하지 않다. 카뮈의 이방인에는 부조리한 삶이 그려진다. 남자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권총으로 아랍인을 살해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이 부조리하다는 카뮈의 생각은 시지프 신화에 더 절절하게 나와 있다. 거대한 바위를 언덕으로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Sisyphos)의 형벌이 인간의 삶이라면, 인간의 삶은 결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그려진다. 소설의 주인공인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5일 만에 거대한 물고기 청새치를 낚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그 잡은 고기는 상어들의 공격을 받아, 결국 노인은 머리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잔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에서 전력을 다해 성공하고 성취했다고 자부하지만, 남는 것은 오직 뼈다귀인 허무 그 자체일 뿐이다.

 

카뮈와 헤밍웨이가 그리는 삶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삭막한 삶이다. 이런 의식에서 나는 더 이상 고귀하거나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나는 줄 밖에 난 글자이고 거꾸로 된 활자이다. 무언가 나는 잘못된 존재이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 의미 없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 이해는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 잘못 태어난 존재가 무슨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죽지 못해 사는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런 비극은 가뜩이나 사회에서 소외되고, 질병과 고독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공자가 느꼈던 천명(天命)이나 장 칼뱅(Jean Calvin)이 말하는 소명(召命)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윈이 말하는 생명의 진화는 자연선택이나 우연한 변이로 이루어진다. 선택의 기준은 개체의 생존과 성공적 번식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생명의 세계가 설계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설계한 자는 의식이 없는 자연선택이다. 여기에는 미리 계획된 의도나 목적 따위는 없다. 자연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런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정신, 우리의 의식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삶의 의미나 목적의 문제는 진화론이 적용되는 육체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적용하기 어려운 정신의 주된 문제이다.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있는 인간은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만족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고통스럽지만 삶을 음미하고 반성하는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 소크라테스는 늘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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