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7) 자사를 찾아서4

이효범 2023. 2. 16. 07:29

(7) 자사를 찾아서4

 

구녕 이효범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착한 본성에 따르면 도덕적인(바른) ()을 갈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적 욕망 때문이다. 맹자도 이점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망을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입이 좋은 맛을 구하고, 눈이 좋은 빛을 원하며, 귀가 좋은 소리를, 코가 좋은 냄새를, 사지(四肢)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명()이 게재되어 있어, 군자는 이런 것을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맹자가 보기에 사람의 오관으로부터 생기는 육체적인 욕망(감각적 욕구, 생물학적 본능)은 모두 사람의 성()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욕망들은 기껏해야 이목구비와 신체가 존속하는 날까지밖에 있을 수가 없어서 유한한 것들이다. 또 그것들은 나의 욕망이 남의 것과 같지 않고, 남의 욕망이 나의 것과 같지 않으니 국한된 것들이다. 그런 유한한 것, 국한된 것은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맹자는 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리학자들도 이런 성은 하늘이 준 본래적인 성이 아니라 육체적인 기질에서 오는 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 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불러, 하늘에서 온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구별하였다. 하늘이 준 본연지성은 선하다. 그러나 육체적인 기질에서 오는 성은 선악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어 위험하다. 배고플 때 먹고 싶고 피곤할 때 자고 싶은 것은 나쁜 욕구가 아니다. 그러나 적절한 음주가 아니라 과도한 음주가 문제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일정한 부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는 결코 나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부모형제도 몰라보고 돈만 쫓다가 패가망신하는 욕심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참다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다.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이 중용도를 닦는 것이 교육이다,(修道之謂敎)”란 말이다.

 

칸트도 비슷한 주장을 편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두 세계에 속해 있다. 하나는 현상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본체의 세계이다. 전자는 자연(존재)의 세계이고 후자는 도덕(당위)의 세계이다. 전자는 동물과 공유하는 측면 즉 본능적 욕구들(자연적 경향성)의 세계이고, 후자는 인간만이 지닌 측면 즉 이성(자유의지)의 세계이다. 인간은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으면서, 전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후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므로 현상에서 오는 자연적 성향(동기)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된다. 행동의 동기는 전적으로 개인의 성향(좋고 싫음)과 자기이익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옳은 행위를 하는 유일한 동기는 그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선의지의 인간(좋은 인간)은 의무에 맞게 행위하고, 의무자체를 위해 행위하는 인간이다. 선의지에 의해 동기 유발된 정신 상태를 지배하는 내적 상태는 친절, 자선심, 사랑의 태도 같이 개인적 성향과 관계하는 상태가 아니라, 도덕법칙을 준수하려는 깊은 의무감 혹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이다.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있어서는 도덕성(morality)을 지닌 행위란 오로지 의무로부터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비롯된 행위뿐이다.

 

칸트가 말하는 자연적 성향이나 유가들이 말하는 기질지성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선한 길을 벗어나 악에 빠진다. 유가들은 교육을 통해 부단히 이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유가의 교육은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도를 닦는(修道) 즉 몸을 닦는(修身) 것이다. 그런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다. 사람이 도를 추구하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에 이르기를, ‘도끼자루감을 베는 일은 그 원칙이 멀리 있지 않다했거늘, 일반 사람들은 도끼자루를 쥐고 도끼자루감을 베면서 제대로 보지 않고, 그 원칙(규격의 기준)이 멀리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다스리며, 잘못을 고치면 그만두는 것이다. 충서(忠恕)는 도와 멀지 않다.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충서의 도(忠恕之道)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도 한다. ‘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는 나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것이 유가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다.

 

공자는 계속해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군자의 도가 네 가지가 있으나, 나는 아직 한 가지도 잘하지 못한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 부모 섬기는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하며,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 임금 섬기는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하며,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 형 섬기는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하며, 벗에게 바라는 것으로 먼저 베푸는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한다. 일상에서 올바른 덕을 실천하며, 일상에서 올바른 말을 하도록 조심하여, 실천에 부족함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고, 말이 넘침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않아, 말은 행동에 부합하고, 행동은 말과 부합해야 한다. 군자가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공자가 일상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도를 강조한 것이다. 이런 도는 성인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심오한 도가 결코 아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도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가? 일상의 평범한 도가 실상은 참으로 습득하기 어려운 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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