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서4
구녕 이효범
후기에 와서 비트겐슈타인은 자기의 그림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고백록』에 나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인용하여 밝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누군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 물어본 순간, 시간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게 됐다.”고 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이 언어의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처럼 ‘지시의미론’에 빠졌다는 것이다. 지시의미론에 의하면 ‘소’라는 단어(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실제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다. 그러면 ‘시간’이 가리키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볼 수도 없고 일정하게 한정지울 수도 없다. 그러니 어렵게 되고 신비스럽게 되어, 철학적으로 쓸데없는 수많은 시간에 대한 담론이 발생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지시의미론으로는 모든 언어의 의미를 명백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론을 제창했다. 그것이 유명한 ‘사용 의미론(use theory of meaning)’이다. 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그 단어가 속해 있는 언어놀이(language game)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으며, 그 언어 사회의 여러 활동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단어(낱말)의 의미는 단어가 지칭하고 있는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고 언어 안에서의 사용 방법이다.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 그 사용이다.” 예를 들어 한 공사장에서 목수가 ‘톱!’이라고 크게 소리 지르자, 옆에 있던 조수가 톱을 집어주었다고 하자. 그것은 그 조수가 ‘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알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말의 의미는 단순히 톱이라는 지시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조수가 톱을 집어주지 않고, 단순히 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경우에도, 그 조수는 ‘톱!’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집을 짓는 공사장이라는 삶의 세계에서, 목수와 조수는 언어로 일정한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조수가 톱을 집어주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단지 톱을 가리켰다면, 그는 금방 흥분한 목수로부터 잘렸을 것이다. 조수는 게임 규칙을 모르는 바보로, ‘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둑을 안다는 것은 바둑이 지시하는 대상을 안다는 것이 아니고, 바둑을 어떻게 둘 줄 안다(사용)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삶의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 놀이를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아마 지시의미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예인지 모르겠다. 고유명사는 하나의 대상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 속에서 고유명사는 극히 일부이며, 또 이름을 짓는 행위도 사실 겉보기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지을 때 우리는 수많은 사회적인 제약 조건을 받는다. 그것도 일종의 언어 놀이인 셈이다. 지시의미론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언어도 있다. 이것은 말씀이 세상을 만드는 경우로, 비단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결혼할 경우 주례가 ‘성혼낭독’을 한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되었습니다.’ 이 언명은 세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드는 발언이다. 이 말을 해야 비로소 결혼이 합법적으로 성립한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두 연인의 만남은 결혼으로 성사되었다고 볼 수 없다.
다양한 언어 놀이가 있다는 말은 우리 언어가 한 가지 기능으로만 쓰여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은 세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기능일 뿐이다. 그 기능뿐이라면 인공적으로 이상언어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은 그리 무모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을 열어라’, ‘아이쿠, 엄마야!’, ‘참 아름답다’와 같은 언어도 사용한다. 그것은 세상을 기술하는 언어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 ‘이것으로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938년 케임브리지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진행된 강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저는 종종 언어를 도구상자에 빗댑니다. 안에는 망치도 있고, 끌도 있고, 성냥도 있고, 못도 있고, 나사도 있고, 아교통도 있지요.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구마다 중요한 차이가 있지요. 도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다양한 도구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일상 언어(ordinary language)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유심히 관찰할 때, 언어의 의미나 더 나아가 철학적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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