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나와 출세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두 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 뵈었다. 동생이 직장을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때는 어머니도 많이 쇠약해 보였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에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광주에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직접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끊여 점심상을 차려 드렸다. 어머니는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날로 산을 내려 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 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였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 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영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친 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선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의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법정 오두막 편지>
'효도에 관한 좋은 문장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님 여한가 (0) | 2022.03.11 |
---|---|
벤 카슨의 어머니 (0) | 2022.03.10 |
돌은 바로 놓고 왔느냐? (0) | 2022.02.16 |
하버드 졸업 30주년 동문회를 다녀와서 (0) | 2022.02.15 |
동봉육가 중 사가 (0) | 2022.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