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콩트(10. 이름)

이효범 2021. 6. 11. 15:15

o 콩트(10, 이름)

 

구녕 이효범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소리 내어 웃으리라. 그래도 용기를 내어 흉내를 내본다. 내 이름은 이효범(李孝範)이다. 본은 함평(咸平)이다. 시조는 이언(李彦)장군이다.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냈다. 중시조는 시조의 11대손인 이종생(李從生)이다. 중시조는 무과 급제 후 신숙주의 군관으로,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으로 책록되었다. 그 후 한성좌윤, 충청도병사 등 다수의 관직을 역임한 후 장양(莊襄)’의 시호를 받았고,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함성군파라고 불렸다. 이종생의 5대손이 장포공(長浦公) 이효원(李效元)이다. 장포공은 임진왜란 때 선조대왕의 어가행렬을 따르며 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겼다. 이 일기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군인과 백성들의 참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장포공은 선조 42(1608)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선조의 후사 책봉 문제로 정변에 휘말려, 거제도에서 16년 동안 귀양살이하였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후 향리인 청양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나는 그런 장포공의 12대손이다. 태어난 곳도 장포공의 묘소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시조로 보면 28대손이다.

 

선친은 계()자 록(祿)자시다. 7남매를 두셨다. 5형제의 돌림자는 범()이다. 그래서 넷째인 나는 효범이가 되었다. 아버님이 효도를 모범적으로 잘 할 것이라고 믿어서 이렇게 지으신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효도를 모범적으로 잘 하라는 뜻으로 지으셨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불효자였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방황이 시작되면서 부모님의 걱정이 많아졌다. 결정적인 것은 대학진학 문제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부모님은 내가 법대나 상대에 가서 출세하기를 원하셨으나 나는 철학과를 고집했다. 부모님은 분노하셨다. 어머니는 철학과를 나온 사람은 대전 원동초등학교 옆 대전천변에서 가마니를 깔고 남의 운명을 봐주는 줄 아셨다. 기대를 많이 한 아들이 그런 일을 하겠다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결국 부모님과 인연을 끊고 내 뜻대로 철학과에 갔다. 불효막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큰 불효는 내가 결혼한 이 후에 부모님의 생활비를 너무나 조금 보낸 일이다. 그 일로 나는 신혼 초에 아내와 곧잘 싸우기도 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메워진다. 건강하시던 어머니는 69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3일이 지나 어머님 장례가 나가려는 아침에, 늘 약을 달고 사셨던 아버님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려고 하지 않으셨는지 따라 돌아가셨다. 다음 날 우리는 길게 슬퍼할 사이도 없이 부모님을 함께 청양에 있는 선산에 모셨다. 사실 외할머니도 그러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만 홀로 남겨 놓고 따라 돌아가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열녀라는 호칭을 받으셨다.

 

효도라면 나는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시장이나 군수도 중앙에서 임명하지 않고 주민 투표로 결정되었다. 시장은 주민들에게 더욱 밀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주시장이 공주시를 둘러보니 시골에는 방치된 노인들이 너무 많았다. 옛날의 나처럼, 자식들이 살아 있어도 자주 찾아오기는커녕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소외되고 아픈 노인들을 국가도 제대로 부양하지 않았고 개인도 봉양하지 않았다.

 

본래 공주는 효도의 고향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효자, 효녀의 행실이 나온다. 두 책에 모두 나오는 효자는 향덕(向德)이고, 효녀는 지은(知恩)이다. 향덕의 고향이 바로 공주이다. “향덕은 신라의 웅천주(현재 충남 공주) 판적향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이요 자는 번길인데, 천자가 온순하고 선량하여 온 고을이 그 행실을 추앙하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향덕 또한 효도와 공손으로 당시에 칭찬을 받았다. 경덕왕 14(755)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유행병마저 더하여, 부모가 주리고 또 병든 데다 어머니는 또 옹질이 발생하여 모두 죽게 되니, 향덕은 밤낮으로 입은 옷을 벗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며, 봉양할 것이 없어 자기 볼기살을 베어 먹이기도 하고, 또 어머니의 옹질을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주로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께 보고하니, 왕은 명령을 내려 벼 3백 가마, 집 한 채, 식구 수에 따라 전 얼마씩을 주게 하고, 관원을 시켜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여 표본으로 삼게 하였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땅을 효가리(孝家里)라고 부른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런 행적에 기초해서 공주시장은 공주를 중심으로 효도 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의 거대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려면 단순히 행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에 시장은 공주대학교에 도움을 요청했다. 공주대학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효문화연구소를 세워 공주시의 효 운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기로 했다.

 

어느 날 총장님이 나를 불렀다. 공주시와 진행된 저간의 사정을 말씀하시고 나보고 소장 직을 맡으라고 하셨다 나는 깜작 놀랐다. 우선 나는 효도를 연구할 자격이 못 된다. 세상의 불효자가 어떻게 효문화연구소의 소장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는 서양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쪽에는 어둡다. 우리 학교에는 동양철학을 전공한 교수가 몇 분 계신다. 그들이 맡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정중히 총장님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랬더니 총장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누구에게 소장 직을 맡길 것인가 교수 수첩을 쭉 뒤져보니, 이효범(李孝範) 교수 이름이 나오는 거야. 이 교수는 효의 모범 아닌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효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공주시와 합동으로 많은 사업을 폈다. 그 중의 하나는 공주시의 효자들을 정리하여 효행록을 간행한 일이다. 살아있는 효자, 효녀, 효부들을 직접 찾아가서 효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끝내고 과연 효행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거 어른들의 효행 사례들 중에서는 남자들보다는 특히 효부들의 사례가 많았다. 그들은 남의 집에 시집 와서 남편과 자식을 돌보는 것 이외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셨다. 병으로 쓰러진 시아버지를 5년 간 모시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4년 간 모신 며느리에게는 개인의 삶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한 겨울에 금강물에 나가 얼음을 깨고 한보따리 빨래를 하며 고생한 것을 글로 쓰라면 몇 권의 책이 될 것이라고 씁쓸하게 웃는 늙은 며느리의 생애를 과연 효부상으로 권장하는 일이 맞는 것일까?

 

사랑은 내리 사랑이다. 자식을 사랑하다가 병원에 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부모를 모시다가 병원을 찾는 사람은 많다. 효도는 결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부모를 내팽개치는 것이 과연 자식이기를 떠나 온전한 사람일까. 이름 때문에 본의 아니게 효문화연구소장을 했지만, 효도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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