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57, 단순히 살기로 했다)
o 단순히 살기로 했다
구녕 이효범
단순히 살기로 했다.
Me too에 걸리면 인생이 너무 복잡해지니까
여자와는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훌쩍 집을 떠날 수 없으니
개는 키우지 않기로 했다.
일주일 내내 한 가지 옷으로 버티기로 했다.
아내 잔소리는
목숨 걸고 무시하기로 했다.
넥타이는 개 끈 같아 남김없이 버렸다.
이효범연구소에 나와 점심을 먹을 때는
가는 음식점만 가기로 했다.
그것도 코로나가 사람으로 전파되니
손님 없는 일정한 시간에만 가기로 했다.
무엇이 진짜인지 몰라
공영방송 뉴스는 안 보기로 했다.
오직 전력투구하는 모습이 장해
여자배구, 골프만 보기로 했다.
아는 사람 혼사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영화관도 피하고
쇼핑도 안 하고
오래 기른 수염도 면도날로 깎아버렸다.
벽만 바라본 수도승처럼
심심하지만 실없는 말을 접고 침묵하기로 했다.
복잡한 건 병이다.
1+2 = 3
단순한 게 진리다.
빛바랜 이름들을 고요에 날려버리고
낡은 사진첩의 사진들은 불태워버리고
우습게 찐 허리 살은 확 깎아내리고
머리통에 쑤셔 박힌 쓰레기는 몽땅 털어버리고
버린다는 그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오늘 아침 눈부시게 찾아온
직선의 햇살처럼 살기로 했다.
후기:
시에 본인의 후기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은 뱀을 그리고 나서 발을 그리는 것과 똑같은 짓입니다. 생각해보면 독자를 우롱하는 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뺏는 일이 되니까요,
그래도 습관처럼 후기를 달아 봅니다. 부끄럽고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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