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54, 새해 아침에 드리는 기도)

이효범 2021. 1. 1. 18:52

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54, 새해 아침에 드리는 기도)

 

o 새해 아침에 드리는 기도

 

구녕 이효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무릎 꿇고 기도하오니,

대나무에 앉은 눈보다 가벼운

어린 아이의 맑은 웃음처럼,

웃음 보다 더 가벼운

먹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살처럼,

새해 아침이 티없이 가벼워지기를.

두 발로 일어나 동쪽으로 손 벌려

큰 목소리로 기도하오니,

세상의 돈보다 귀한

강에 흐르는 물처럼,

물보다 더 귀한

빈 우주를 뚫고 솟아나는 생명처럼,

새해 모든 날들이 눈부시게 귀하기를. 

 

후기:

2021년 새날이 밝았습니다. 지난해는 돌아보기조차 싫습니다. 올해는 辛丑年 소의 해입니다. 소처럼 꼭두새벽에 일어나 일하러 가야 할 텐데 퇴직한 나로서는 오라는 곳이 없습니다. 모처럼 지난밤에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늦게까지 졸면서 읽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 일어났습니다. 새해 첫날이라 그런지 아내는 평소에 하지 않던 떡국을 끓여놓고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미안한 마음에 다소곳이 앉아 먹고 있자니 아내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여보, 올해는 무엇을 하고 싶어요?”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에 말문이 맞혔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30대 젊은 여자를 만나 신나게 연해 한번 하고 싶다眞心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일 모래면 70인데 이 나이에 무슨 특별히 할 일이 있겠어.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어요.” 그랬더니 아내는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올해는 당신의 사람을 받고 싶어요.” 그 소리에 하마터면 먹던 떡국을 엎지를 뻔 했습니다.

내가 충청도 양반이라 야살스럽게 사랑 표현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것보다 백배는 잘했는데, 늙은 나이까지 이런 사랑 타령을 하다니 참으로 억울했습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냥 어렵게 장만한 연구실로 향했습니다. 새해 첫날 추운 연구실을 지킨 것이 무슨 大學者인 것 같아서 어깨가 으쓱했지만, 책은 잘 안 들어오고, 그래서 그냥 컴퓨터에 앉아 바둑만 실컷 두었습니다.

일찍 어두워지는 것 같아 밖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길이 얼 걱정으로 급히 가방을 챙겼습니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그냥 집에 들어가려니, 주름살 많은 아내가 사랑받고 싶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무언가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빈 손은 안 되겠다. 파라 바게트에 갔습니다. 이리저리 빵을 둘러보다가 자주 샀던 빵들이라 너무 평범한 것 같아 그냥 나왔습니다. Y마트에 가니 입구에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연애할 때 길거리에서 사서 호호 불며 먹던 옛 가난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6000원 주고 한 봉지를 샀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식지 말라고 품속에 감쌌습니다. 아내는 나의 이런 갸륵한 정성을 알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