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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1(오바노스)

이효범 2024. 4. 24. 00:22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11(오바노스)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타이고 순계길 11(오바노스)

 

구녕 이효범

 

8시에 길을 나섰다. 영상 3, 쌀쌀하다. 순례자는 마구간에서 나가야 하는데, 집주인의 안방에서 나가니 참으로 민망하다. 바닥에 새겨진 조개 모양 순례길을 따라 구도심을 당당하게 빠져나가려니, 갑자기 중학교 때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온다.

 

큰형님이 공무원이 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광천에서 대전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나는 광천에서 초등학교를 다 마치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전의 명문 대전중학교에 입학했다. 개학하는 날 쭐레쭐레 학교에 가는데, 선배가 빠르게 가는 길이 있다고,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그래서 나는 멋도 모르고 운동장으로 난 개구멍을 통해 교실로 들어갔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구녕(久寧이라는 호가, ‘오래 안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좋게 붙여준 의미일 뿐, 사실은 중학교 개구멍에서 유래하였다. 친구들이 서로 호를 지을 때, 재미있으라고 한 막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호를 사랑한다. 광천 시골 천재가 중학교에 들어와서는 그 빛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아주 못한 것은 아니다. 혈기 있게 보냈다. 가끔 시골 촌놈이 혈기가 넘쳐 친구를 때린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때린 친구들이 모두 다 잘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몇 놈 더 때릴 걸 하는 후회가 된다. 중학교를 잘 보내고 옆에 붙어있는 대전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중학교 때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당당하게 나온 것이, 지금 팜플로나를 택시 타고 옆 구멍으로 들어와서, 이틀을 잘 보내고, 정문으로 나가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구도심을 빠져나오자 넓은 정원이 전개된다. 그곳에서 정신 없이 사진을 찍느라고 길을 잘못 들었다. 아침부터 창피하게 남에게 물어서 길을 바로잡았다. 구도심을 둘러싼 넓은 정원은 마치, 구도심은 명품 그림 같고, 정원은 그 그림을 담고 있는 액자의 틀 같다. 틀 밖은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 공간이다. 원도심의 화려함과 곡선은 신도시의 직선이 주는 효율성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서울이나 공주처럼 오래된 원도심이 있는 도시들은 바깥 신공간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그리고 아예 원도심이 크게 의미가 없는 대전 같은 도시들은, 어떻게 낙후된 원도심을 재생시켜야 할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또 길을 잃었다. 산책하는 할아버지가 소리쳐 방향을 바로 잡아준다. 낯선 곳에서 길을 갈 때는 길만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다. 40분 정도 걸어서 팜플로나 도시를 빠져나왔다.

 

팜플로나는 정원이 많고 깨끗한 도시이다. 또 고유한 축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도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바닥에 조개 문양이 사라지고 실개천에 난 다리를 건넜을 때, 앞에 가던 고운 할머니가 급히 되돌아온다.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니 비록 산티아고 가는 안내 표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나는 길을 가리키고, 할머니에게 말을 붙이려고 했으나, 발걸음이 보통 빠른 것이 아니다. 말을 하고 싶은 금발의 할머니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미모에서 집에 있는 아내와 비교할 만한 상대는 전혀 아니다. 아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1분 후에 놀랍게도 전화가 왔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받아보니, 아내다. 내가 집을 떠난 지 처음이다. 516일에, 파리 드골 공항 가는 비행기 비즈니스석이, 보통 350만 원대인데, 250만 원짜리 싼 것이 나와서. 끊으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나는 당황하여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마 정확한 답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벅벅거리다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말을 흐렸다. 그러나 정말로 쇼킹한 것은 아내의 전화 내용이 아니라, 내가 아내를 생각하자마자 아내가 전화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과연 우리가 아직도 잘 모르는 신비의 세계가 있다는 말인가?

 

오늘은 하루 종일 심한 바람이 분다. 본래 이곳이 바람이 많은지 산등성이에는 풍력발전기가 여러 대 세워져 있다. 바람에 날리는 끝없는 구릉지의 밀밭은, 광활한 바다에 이는 파도와 같다. 시원하고 멋진 풍경이다. 800m 고개에 오르니, 저 멀리 피레네의 영봉들이 산맥을 이루고, 팜플로나는 푸른 바다 위의 붉은 섬처럼 아스라이 떠 있다. 규모는 비록 비교할 수 없지만 대관령에서 내려다보는 강릉의 풍경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신사임당은 대관령을 넘으면서 친정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어머니는 흰머리로 임영에 계시는데/ 이 몸은 서울을 향하여 홀로 가는 심정이여./ 머리 돌려 북촌 마을 때때로 바라보니/ 흰 구름 날아내리고 저녁 산이 푸르구나.” 나는 비록 이틀 밖에 팜플로나에 머물지 못했지만, 고개에 올라 그림 같은 도시를 멀리 보니 시를 짓고 싶었다. “피레네산맥 아래/ 새들의 보금자리처럼/ 빛나는 팜플로나여!/ 당신의 자궁에서 난 성인 하나가/ 나를 오늘 여기로 이끌었다./ 우리는 진리의 벗/ 진리 속에서 하나가 된다.” (2024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