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존 스튜어트 밀을 찾아서 3
o 존 스튜어트 밀을 찾아서 3
구녕 이효범
쾌락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 벤담의 윤리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도덕감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이런 난점을 밀은 인간 본성을 벤담과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형이상학적, 혹은 추상적 접근을 거부하고,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취하는 점에서 밀은 벤담과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밀은 인간의 질적 개선을 위한 목적론적 경향을 보임으로써, 벤담과 전혀 다른 철학을 보인다. “벤담은 인간을 쾌락과 고통에 민감하고, 모든 행위에 있어서 사리사욕과 이기적인 열정에 의해 지배되는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증오에 의해 지배되기도 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대한 벤담의 이해는 여기서 끝난다. 그는 인간이 정신적 완전성을 목표로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밀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본성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고 규정한다. 밀에 의하면 사회 상태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여러 요소의 자연스러운 발산이어서, 그러한 상태를 전제로 하지 않는 인간들을 상상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기를 보존하고 동시에 이상을 실현하여 바람직한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해야 하고, 또한 관습이나 전통, 혹은 실정법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밀의 경우 이러한 사회성도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는 보잘 것 없는 개체를 아끼는 마음이 있을 뿐, 그 누구도 사랑하거나 위할 줄 모르는 단순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그 어떤 선천적인 필연성은 없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대로 자라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에 대한 참된 사랑과 일반의 행복을 바라는 진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밀은 인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토마스 홉스의 이기적(利己的)이고 비관적인 인간관을 거부한다. 동시에 쾌락주의가 단순히 이기주의적 표현이 아니라 이타주의와 양립함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밀은 벤담의 관점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밀은 인간이 누구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고 본 점에서는 벤담과 의견을 같이하지만,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인간과 다른 동물뿐만 아니라, 탁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 사이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밀에 의하면 쾌락에는 양적 차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 차이가 있다. 질적 차이는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경험 있는 자(hedonic expert)’가 직관(直觀)에 의해 쾌락의 우열을 판별할 수 있다. 즉 두 가지 쾌락이 있을 때, 그 둘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사람은 질적으로 높은 쾌락을 추구한다. 질적으로 높은 쾌락 중에는 남의 행복을 즐기는 쾌락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쾌락 추구의 천성이 인간을 이기적 동물로 만들지 않고 공중의 행복과 양립시킨다. “만족한 돼지이기 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인 편이 더 낫고, 만족한 바보이기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인 편이 더 낫다. 그리고 만일 바보나 돼지가 이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이 문제에 있어 오직 그들 자신의 측면에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과 비교되는 상대편, 즉 사람이나 소크라테스는 양쪽 측면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질적인 차이에 따라 쾌락은 천박하거나 고상해질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쾌락의 양만 늘릴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행복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곧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밀은 이것 또한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가지 쾌락을 모두 향유할 수 있는, 즉 고차적 기능과 저급한 기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은, 저급한 기능의 발휘가 중심이 되는 생활방식을 결코 의식적으로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현저하게 그러한 생활방식을 택하는 것은, 어떤 심리적 원인이나 사회적 여건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성격의 나약함이나 경쟁에서 오는 적대감, 필수품의 결핍, 시간과 기회의 부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런 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돼지의 행복과는 다르다. 그리고 열등한 인간의 행복과 위대한 인간의 행복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려면, 열등한 유형의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것이며, 아마 고통에도 더 민감하기 때문에, 많은 점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스스로 더 낮은 존재의 삶이라 여겨지는 것으로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밀은 행복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돈, 명예, 권력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를 그 부분으로 삼는 복합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점이 벤담이 쾌락 공리주의자인 반면, 밀을 이상(理想) 공리주의자로 분류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그리고 밀은 ‘공리의 원칙(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벤담은 사람이 심리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고, 그런 본성의 실현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결론은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쾌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선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 최대다수의 최대 쾌락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한다. 그럴 경우 희생되는 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가? 예를 들어 마을 공동체의 전체 이익을 위해서는 길을 내야 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한 사람의 농토로 내야 하는 경우, 그 사람은 왜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의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하는가? 자기 이익(쾌락)을 따르는 것이 정당하다고 전제하면서, 그것을 희생하면서, 공리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벤담을 계승한 공리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골머리를 앓았다.
이 문제에 대해 밀도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논변을 펼치고 있다. 그는 자기의 논변이 과학적 의미로서의 증명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광의의 증명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이 보일 수 있다는(visible) 것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대상을 본다(see)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릴 수 있다는(audible)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hear)는 것이다. 우리 경험의 다른 원천들도 모두 이와 같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desirable) 것을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다는(desire)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왜 일반의 행복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제시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우리는 행복이 곧 선임을 증명하기에 필요한 모든 증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행복은 그 개인에 대해서 선이요, 일반의 행복은 모든 사람 전체에 대해서 선이다. 이로써 행복은 행위의 궁극목적의 하나이자, 또한 도덕의 기준의 하나로서, 자신의 입지를 입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