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10) 존 스튜어드 밀을 찾아서 1

이효범 2023. 5. 3. 06:40

o (10) 존 스튜어드 밀을 찾아서 1

 

구녕 이효범

 

합리주의의 성자(聖者)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1806년 제임스 밀(James Mill)의 장남으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 창시자인 벤담(Jeremy Bentham)의 친구로서, 영국령 인도사(History of British India)를 쓴 당대의 명사이자 대학자였다. 이 책은 아들의 유년기를 지배했고, 아들의 직업을 결정했다. 그는 밀을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엄격하게 가르쳤다. 밀은 아버지가 읽고 있는 책을 읽었으며, 그 책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공유했다. 그 결과 밀은 놀랄만한 학문적 성취를 맛보았다.

 

밀은 3살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워서 8살에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의 책을 원서로 읽었다. 8살부터는 라틴어를 배워서 오비디어스 등이 쓴 라틴어 고전을 읽었다. 12살부터는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원어로 읽었다. 13살 때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을 통해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4살 때는 프랑스에서 1년을 지내면서 몽펠리에 대학에서 화학, 논리학, 고등수학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17세 이전에 이미 아버지 친구들인 벤담과 리카도 등의 석학들과 토론할 정도로 지적 성장을 이루었다. 17세 때인 1823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입사하여 아버지의 조수로 일했으며, 그 후 1858년까지 재직하며 연구와 저술 활동을 병행했다. 동인도 회사는 봉급을 많이 줄 뿐만 아니라 근무 시간도 짧고 여유로워, 밀은 신문과 정기 간행물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글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상당히 세련된 논문들을 봇물같이 쏟아내었다.

 

밀의 위기는 20살에 왔다. 학문적 성취 뒤에 그는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려,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고 우울해졌다. 밀은 그 원인이 분석적 생각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분석은 우연하게 밀착된 여러 이념들을 정신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관념이 가지는 편견의 모든 결과를 약화시키고, 그 편견을 타파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바로 그 장점 때문에 그 관념이 가지는 감정마저 약화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욕망과 쾌락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분석의 습관은, 신중한 사색과 통찰력에 대해서는 유리하지만, 정열과 미덕의 밑바닥에 언제나 잠재되어 있는 해충과 같은 것이다.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시들은 감성의 회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 밀은 감정을 회복하였다.

 

감정의 중요성을 깨달은 24살 때, 밀은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해리엇은 자기를 한 사람의 동료로 대우해준 밀에게 끌렸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3명의 자녀를 둔 유부녀였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과 해리엇의 정신적 사랑은 2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테일러는 밀의 글을 전부 읽고 논평해주었고, 밀은 테일러의 주장을 최대한 반영했다. 마침내 해리엇의 남편이 죽자, 두 사람은 결혼했고, 7년 뒤 해리엇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폐출혈로 사망했다. “그녀는 참으로 깊고 그윽한 지혜를 가졌다. 이제 그와 같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쓰는 글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을까.”

 

해리엇이 죽은 뒤 웨스트민스터 지역의 시민들은 명성이 높아진 밀을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하원의원이 된 밀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극도로 심화된 계급 격차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개선하고자 노동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우렸다. 노동자들을 포함한 보통 선거권을 주장하면서도, 다수의 중우정치(衆愚政治)를 우려하여, 복수투표제를 주장했다. 그리고 여성평등과 해방을 주장하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펼쳤다. 밀은 문명국가 최초로 여성 참정권 문제에 대해 의회 단상에서 연설한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하원의원으로서 행한 참으로 중요한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아일랜드의 대기근 당시에는 아일랜드를 돕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3년간의 정력적인 진보적 정치활동은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가진 지역의 유권자들의 눈 밖에 났다. 재선에 실패한 밀은 아내가 묻혀 있는 아비뇽에 머물면서 자서전 집필에 열중했다. 18735, 밀은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고 또 말년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식물채집 여행 도중 풍토병에 걸려, 그달 8일에 별세했다. 죽던 날 밤 그는 나의 일은 끝났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