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을 찾아서6
o 퇴계 이황을 찾아서6
구녕 이효범
성리학의 본체론에 의하면 만물을 구성하는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지만(不離), 그렇다고 서로 섞어지는 것도 아니다(不雜). 퇴계는 이중에서 불잡성(不雜性)을 더욱 강조한다. 그 이유는 공자 이래 유학의 전통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그의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퇴계는 “리와 기를 섞어서 말하게 되면 성(性)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래서 고봉의 끈질긴 비판에도 그는 끝까지 ’하늘이 품부한 도덕적 단서인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인간의 욕망이 개재된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리기호발설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퇴계는 평생을 존리적(尊理的)인 태도로 살았다.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일상(日常)은 현상적인 기의 세계와 그것을 통어하는 보편적인 원리로서의 리가 결합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상의 세계는 천지의 질서와 선험적 가치를 존중하고자 하는 순선(純善)의 리적 요구와, 개인의 이해와 욕망 속에서 번뇌하는 기적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계이다. 퇴계는 자기가 살던 일상을 기의 요구가 너무나 거대해서 리의 밝은 빛이 가려진 어둠의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이런 병폐를 바로잡은 길은, 리와 기를 계속 섞게 나누어서는 안 되고, 리의 독존(獨尊)을 드러내서, 그 리의 빛으로 기의 광란을 제압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리의 독존을 드러내는 공부가 경이라고 믿었다.
“리는 본래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것이어서 사물을 명(命)하지 사물에게서 명을 받지는 않는 것이니, 기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는 형태가 이루어진 뒤에 문득 이 기가 터전이 되고 재료 도구가 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모든 일이 시작되고 운용되며 응접함에 대개 기가 일을 하는 것이 많습니다. 기가 능히 리를 따를 때는 리가 저절로 나타나니, 기가 약한 것이 아니고 순응하는 것입니다. 기가 만약 이와 반대되는 때는 리가 도리어 숨어버리니, 리가 약한 것이 아니고,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비유하면 왕은 본래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것인데, 강한 신하가 날뛰면 도리어 그와 더불어 승부를 가리게 되니, 이는 신하의 죄이지 왕은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학문을 하여, 기질이 편벽된 것을 교정하여 물욕(物慾)을 막고, 덕성을 높여, 가장 바르고 지극히 옳은 도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리와 기를 명확히 분간하지 않으면 인간은 그의 개인적 욕망을 공적인 선의(善意)로 착각하기 쉽다. 지금도 푸틴 같은 독재자가 이런 위험한 생각에 빠져 인류를 재앙에 빠트리고 있다. 리와 기가 불리(不離)라고 해서 한 사물로 간주하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가 바로 성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잘못에 빠지게 되고, 욕심이 그대로 천리라고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퇴계는 경(敬)을 통해 인욕의 방출을 억제하고,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리를 대면시키려고 했다. 경은 마음의 자연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기는 하나, 결코 불교나 노장이 말하는 허령(虛靈)한 공적(空寂)의 세계는 아니다. 퇴계의 경은 일상의 실천적 행위 속에서 통합된 전일성(專一性)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그는 이런 이론적 토대 위에서, 중국 송대의 유학자들이 미해결로 남겨놓은, 공부의 내적과 외적인 방법인,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퇴계는 많은 저서와 논문을 썼고 많은 제자를 두었다. 퇴계의 문인(門人) 중에 서원과 사우(祠宇)에 배향된 학자가 74명에 달한 것을 보면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퇴계 이전에 그와 같은 학자들은 일찍이 없었다. 퇴계의 영향은 외국에서도 심대했다. 임진왜란 후 퇴계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 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 후지와라 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야마자끼(山崎暗齋)는, 지난 날의 유학자들이 미치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퇴계의 『자성록』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제자인 사또(佐籐直方)는 퇴계의 학식이 원명(元明)의 유자들보다도 훌륭함에 탄복했다.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들에게도 퇴계는 크게 존숭을 받았다. 량치차오(梁啓超)는 거리낌 없이 퇴계를 성인이라고 호칭했다. 퇴계에 대한 조호익의 평가는 적절하다. “주자가 작고한 뒤(---) 도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퇴계 자손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17대 종손이 이치억(李致億)이다. 그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퇴계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내가 퇴임한 다음 해(2021년)에, 20대가 넘는 경쟁을 뚫고 담당하게, 그 유명한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선임자인 나는 비록 학문에 부진했지만, 이 교수는 부디 퇴계에 버금가는 대학자가 되어, 우리 철학을 세계철학의 반열에 올려놓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끝)